강응천 <문사철> 대표

검찰과 언론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일이 많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대표적인 기관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검찰과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할 때 권력의 부패를 막고 민주주의 체제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검찰과 언론처럼 권력을 견제하는 기관은 민주주의 시대에 들어와서야 생겨난 것이 아니다. 동양의 옛 왕조 시대에도 군주제의 부패를 막기 위해 권력을 비판하고 탄핵하는 기구들이 있었다. 바로 ‘대간(臺諫)’이라 불린 이 기구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기능과 성격은 조금씩 달라졌다. 

대간은 관리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어사대(御史臺)의 ‘대관(臺官)’과 군주에게 간쟁하는 간원(諫院)의 ‘간관(諫官)’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 ‘간쟁’이란 군주의 잘못을 비판하는 일을 말한다. 대간이 제도로 확립된 것은 중국의 한나라 때였다. ‘어사’라는 말은 이미 <주례(周禮)>에도 등장하지만, 한나라 때 비로소 어사부 같은 독립 관서를 설치하고 감찰 업무를 담당하는 대관들을 배치했다. 그것이 당나라 때 어사대로 정리되어 후대로 이어진다. 황제와 대신들에 대한 간쟁을 맡은 간관으로는 한나라 때 간대부(諫大夫), 당·송 때 문하성과 중서성의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이 있었다. 이들 대간은 송나라 때부터 감찰과 간쟁이라는 서로의 임무를 넘나들며 활동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대간 제도가 정비되었다. 고려 때는 사헌대(司憲臺)나 어사대에 정3품의 대부를 책임자로 하는 대관들을 배치했다. 중서문하성에서 3품 이하 관리들은 간쟁을 담당하는 낭사(郞舍)를 구성했는데, 이들이 간관에 해당한다. 대간은 중국처럼 권한과 책임을 나눠 가지면서 ‘언관(言官)’으로 통칭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은 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환관의 위세가 커지고 대간이 위축된 반면, 한국은 대간 제도가 발달하고 환관의 위세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천자로 일컬어지는 중국의 황제는 압도적 권위와 전제 권력을 바탕으로 드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다 보니 소수의 측근에게 힘이 생기게 되었다. 정치적 혼란기에 그러한 측근은 대부분 환관이었다. <삼국지>에도 나오는 후한 말의 십상시(十常侍)와 당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고력사(高力士)가 대표적 사례다. 

조선 시대에 대간 역할을 한 것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으로 이루어진 삼사(三司)였다. 초기에는 태종, 세종 등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삼사의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조가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뒤 왕권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삼사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특히 성종은 성리학 이념에 입각해 듣기 싫은 소리도 참아내면서 삼사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러나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은 삼사의 간쟁과 탄핵을 참지 목하고 두 차례나 사화를 일으켰다. 연산군이 쫓겨난 뒤 중종이 조광조를 대사헌으로 기용해 개혁을 시도한 것은 유명하다. 

조광조의 개혁은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하지만, 삼사는 그 실패를 넘어 끝내 왕조의 자기정화 장치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한다’는 유명한 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권력을 견제하는 삼사의 기개를 상징했다. 조선이 오백년 넘게 유지된 것은 삼사의 권능이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군주(君主)에서 민주(民主)로 시대가 달라진 뒤에도 대간과 유사한 기관이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대간에 비견되는 검찰과 언론이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하는 것은 그들이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대신 권력과 유착해온 역사 때문이다. 대간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권력이 어떻게 되는지는 중국의 환관정치가 잘 보여주고 있다. 전제군주제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간을 두어 자신의 잘못을 비판하도록 했는데,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검찰과 언론의 책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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