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내에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부대신문>은 그 현장에 있었다.
주요 학내 사안을 취재 했던 기자들을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논의없는 대학 통폐합, 2011년 학생총회 열리다

2011년 8월, 우리 학교 김인세 총장이 ‘부산대-부경대 공동발전 선언문’에 서명하면서 대학 통합의 불씨를 지폈다. 하지만 공동발전 선언문 작성 과정에서 학내 구성원의 의견 수렴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2011년 9월 21일 총학생회는 학생총회를 주최했다.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가

당시 국립대 법인화 논란이 큰 이슈였다. ‘2011년도 국립대학 구조개혁 추진계획’에 따르면 국립대학교 통폐합은 국립대학 법인화의 기반 마련 사업으로 명시돼 있다. 2011년에 서울대가 법인화 절차를 밟으면서 우리 학교도 부경대와 통합을 통해 법인화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이때 김인세 총장이 학내 구성원 의견 수렴 없이 공동발전 선언문에 서명했다. 학생과 논의 없이 통합 논의가 이뤄지면서 총학생회가 반발하며 학생총회를 열었다.

△당시 학생총회에서 어떤 안건이 나왔는가

주요안건은 △비민주적 통합 반대 △총장 선거 투표권 쟁취 △학생 공간 확보 △2012년 반값등록금 실현이 있었다. 이 중 비민주적 통합 반대와 총장 선거 투표권 쟁취가 화두였다. 총장이 구성원과 논의 없이 통합을 진행하려고 했으니, 통합 반대가 가장 큰 화두로 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총장 선거 투표권 쟁취는 학생들이 총장 투표 선거권이 없으니 총장이 독단적으로 통합을 진행했다고 판단해 안건으로 상정됐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엇인가

학생총회를 열기 위해 필요한 개최정족수가 4,993명인데, 학생총회가 열리는 당일 저녁 7시가 될 때까지 4천 명 정도만 참석 했다. 학생총회를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 총학생회가 제2도서관(현 새벽벌도서관)에 들어가 무릎을 꿇으며 참석을 독려했다. 총학생회의 노력 덕분인지 총 5,440명이 참석해 학생총회 개최가 성사됐다. 기사로만 보면 5천 명이 간단하게 모인 것 같지만 정말 어렵게 만든 결과였다.

△지금 당시 기사를 다시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올해 부마민주항쟁 40주년을 맞이했 다고 들었다. 당시 선배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하려고 했던 것처럼 2011년 학생총회도 학내 민주주의를 위해 학생들이 움직였다는 것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총장의 독단적인 정책을 저지하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모습이 아직도 존경스럽다.

 

대학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2015년 총장직선제 논란

2015년 박근혜 정부는 국·공립대학에 총장직선제 폐지를 거세게 밀어붙였고, 우리 학교는 총장직선제를 지키기 위해 본부와 교수 간에 대립이 있었다. 그러던 중 2015년 8월 17일 총장직선제 수호를 위해 故 고현철 교수가 대학본관에서 투신했다.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가

故 고현철 교수가 투신하기 전까지는 학생들이 총장직선제를 우호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총장 선거는 교수와 직원만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고 학생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학생들 사이에서 선거에 참가하지 못하니까 총장직선제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또한 당시 정부는 총장직선제를 고수할 시 대학재정지원사업을 재검토하겠다면서 학교를 재정적으로 압박했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선  총장직선제를 굳이 해야 하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故 고현철 교수가 투신하고 나서 학내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故 고현철 교수가 투신하고 나서 당시 총장이 사퇴하고, 교수회장은 입원한 상태여서 학교가 전반적으로 붕 뜬 상태였다. 그럼에도 학내 구성원 모두가 직선제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본부와 교수회는 빠르게 총장직선제를 진행했고 총학생회도 지지 선언을 하고 다른 국립대도 함께 연대하기로 했다.

학교 분위기는 추모와 장례로 침울했었다. 특히 故 고현철 교수가 재직했던 국어국문학과는 감정적인 동요가 더 심했다.  이후로는 총장직선제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다만 정부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니 정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당시 정부가 재정으로 대학교를 주무르는데 가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효원문화회관 문제도 남아 있어 재정 문제에 대한 학교 측의 두려움이 컸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엇인가

당시 기자들 모두 취재하면서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상황이 슬프다 보니 기자들의 감정에도 동요가 있었다. 또한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원망을 많이 했다. 故 고현철 교수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학생들이 총장직선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시 기사를 다시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기사를 보면 당시에 기자로서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학내 언론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열심히 일 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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