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의 설렘이 오래 가지 않는 관계는 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마음에 안 들면 헤어질 수라도 있지만, 평생을 함께 가야만 하는 직업을 향한 열정이 전과 같지 않음을 느끼면 퍽 당황스럽다. 이 길이 내 길이 맞는 것인가. 더 늦기 전에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바꿔도 똑같으면? 재미없고 시시하면? 서른 줄 넘어 기껏 바꾼 직업에서마저 적응 못 하고 방황하면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누가 나를 받아주는가? 대책 없는 용기는 만용이라고 했다. 30대 초반에 그 만용이 고개를 드는 고비를 잘 넘기고 다시 직장에 헌신하리라 마음먹은 지가 5년. 나는 어느새 탈의함에서 주임 간호사라는 명패가 달린 유니폼을 꺼내 입게 되었다. 간호사의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알 만큼 충분히 알았기에, 이제 더는 외부의 사건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고매의 단계. 적당한 권력과 적당한 위엄과 적당한 보수가 수반되는, 아주 훌륭하지는 않아도 꽤 괜찮다고 볼 수 있는 인생. 내 인생의 36번째 해는 퇴근 후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노을을 감상하며 귀가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신해철의 노래 가사처럼 그날의 일들을 얘기하며 잠이 들 짝은 없어도 행복한 일상이었다. 지난 추석 때는 당돌한 조카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와…… 저는 그렇게 쳇바퀴 돌리듯 굴러가는 인생은 저하고는 좀 안 맞을 것 같아요. 전 흥미진진한 모험이 좋거든요.”

그 말을 한 조카는 나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큰 언니의 아들이었다. 명문대학의 기계공학과에 재학 중이라는 그는 마음 맞는 학우들과 창업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조카에게 꿀밤을 먹이고 말했다.

“짜샤, 너도 나이 먹어 봐라. 왜 어른들이 그렇게 안정적인 거 좋아하는 지 알 거다?”

“아, 저는 저커버그처럼 스타트업의 신화를 쓸 거라고요!”

“아유,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다 해! 그때 안 하면 언제 하겠니.”

용돈으로 줄 5만 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고 녀석의 머리를 문질러 줌으로써 그 자리는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었다. 스타트업으로 수백억을 벌 거라든 조카 녀석은 눈앞에 펄럭이는 5만 원을 받자마자 ‘이모 사랑해요’를 외쳤다. 몇 년 전의 나였다면 조카의 배려 없는 언행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틈날 때마다 꺼내 보며 삭혔을 것이다. 하지만 고매의 경지에 이른 주임 간호사는 대학생의 그깟 패기 따위는 우습게 넘길 수 있었다. 그 나이 때는 원래 다 그런 법이니까. 나는 조카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랐다. 나중에라도 그 기세등등한 녀석이 어떤 기업은 연봉이 얼마고 복리후생이 어떻고 등의 이유를 대면서 현실에 꺾인 패기를 애써 위로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부디 그의 만용이 근거를 갖춘 용기로 발전하기를 나는 소망했다.

병원에서 직원들을 위한 출퇴근 전용 버스를 운용하고 있었기에 나는 자리에 앉아 읽다 만 소설책을 펴고 출근길의 여유를 즐겼다. 이것도 나름 특권이라면 특권이다. 한창 책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버스가 병원 가까이에 왔을 때 책을 덮고 창밖의 풍경을 향해 눈을 돌렸다. 마지막 탑승자들이 버스를 타는 이곳은 근처에 어린이집이 있어서 아이 손을 잡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많이 들르는 곳이었다.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엄마 손을 놓기 무섭게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아이도 있었고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서럽게 울어대는 아이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참 부러운 풍경이었다. 부족할 것 없는 내 인생에 유일하게 부족한 한 가지를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매일 아침 돌아오는 이 짧은 정차 시간 동안, 나는 항상 어린이집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이제 와 욕심을 내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이 나이에 육아휴직을 신청하면 동료 간호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결정을 내리기엔 여전히 용기가 부족했다. 아련한 감상을 남긴 어린이집을 뒤로하고, 버스는 병원으로 곧장 달렸다. 주차장에서부터 내가 근무하는 6층 병동까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리고 안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으며 간호사로서의 내 인생이 농축된 일터에 도착했다. 근무 시간이 끝날 무렵이 된 야간 담당 후배들은 눈 아래가 움푹 파인 채로 힘없이 인사를 건넸다. 야간 근무라는 게 원래 힘든 일이었지만 그 날따라 후배들은 더 힘이 없어 보였다.

“아, 선배님…… 안녕하세요.”

“지영씨,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흐으, 말도 마세요. 새벽 2시에 갑자기 응급환자 들어오는 바람에 얼마나 난리를 피웠는지.”

“뭐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니잖아? 외상 환자야? 차트 줘 봐.”

“외상 환자면 마취제 맞고 푹 자기라도 하죠…… 병실 들어오고 나서 30분에 한 번씩 비명 지르시는 통에, 환자들 다 깨고 저희도 계속 뛰어다니고 죽는 줄 알았어요.”

“이거야? 임혜진 환자, 여성. 응? 심장암? 뭐야 이게? 거기다 나이가 스물일곱? 너무 젊잖아!”

암 병동에서 보기에는 증상도 나이도 매우 생소했다. 20대 암 환자야 가끔가다 볼 수 있는 사례였으므로 어떻게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암이 발생한 부위가 심장이라니. 굳이 내 경력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한국에서 이런 사례를 실제로 본 간호사의 숫자를 꼽으라면 50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심장은 세포 분열을 하지 않으므로 암이 발생할 수 없는 기관입니다.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도, 대학교 생리학 시간에도 상식처럼 취급되던 명제를 깨트리는 반례를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저도 너무 놀라서 찾아보니까 만 명 중 한 명 걸릴까 말까 하는 병이래요. 참나.”

“그럼, 담당의는 뭐래? 아니 담당의 정할 수는 있는 거야?”

“글쎄요. 오늘부터 이런저런 검사 돌리면서 예후가 얼마나 안 좋은지 알아보지 않을까요? 어흐, 일단 어제는 당직 보던 정 선생님이 와서 진통제 포함해서 이것저것 처방은 해줬는데, 병동에 맞는 약이 없대요.”

“하긴, 만분의 일을 어떻게 대비하고 있겠어. 그럼 지금 상태는 어때?”

“하도 소리를 많이 지르다 보니 지쳐서 겨우 잠든 것 같아요. 정말, 오늘 험난하실 거예요, 선배. 저는 이만 퇴근해보겠습니다.”

지영씨는 옷을 갈아입고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함께 야간 근무를 선 동료 간호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나를 포함한 주간 근무조는 먼저 스테이션에 모여 조례를 시작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출근 후 간밤의 긴박했던 상황을 전달받은 수간호사는 상기된 표정으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난 수간호사 되더라도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굳이 귀에 담을 가치가 없는 말들이 10분 동안 이어지는 와중에, 한 부분만큼은 나의 주의를 잡아끌었다. “아, 오늘 새벽에 입원하신 환자분이 워낙 희귀한 사례인지라 원장님을 포함해서 병원 전체에서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각별한 신경을 당부드리고, 우리 병동에서도 가장 숙달된 간호사들이 전담으로 붙어서 간호하도록 해요.”

숙달된 간호사라는 단어를 말하는 수간호사의 시선이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사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맞는 것인지 나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실력을 인정받았으니 기뻐해야 하는 건지,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되어 낙담해야 하는 건지. 다만 확실한 한 가지는 수간호사를 향한 나의 모멸감이 더욱 커졌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부터 간호사가 남들의 주목을 받을 때 더 열심히 일하는 존재가 되었단 말인가? 어쩌면 저런 출세 지향적인 직업관을 가지고 있기에 그녀가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수간호사 자리에 올랐는지도 몰랐다. 나는 절대로 저런 상사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조례 이후의 업무는 아침 식사를 마친 환자들의 맥박과 혈압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각 환자에게 필요한 약을 분배하는 일이었다. 혈압약, 페니실린, 인슐린 등 환자의 증상에 따라 필요한 갖가지 약품들을 가득 담은 카트를 끌고 병실을 순회한 후 자리로 돌아와 차트를 업데이트하면 어느새 점심시간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 아름다울 정도의 규칙성을 가지고 돌아가는 스테이션의 일상이 깨지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거의 마지막으로 배정된 임혜진 환자의 차례가 돌아오자, 카트를 둘러싼 간호사 두 명과 담당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임혜진 환자가 입원한 병실의 분위기는 입구부터 스산했다. 그녀가 밤을 새우며 고통의 절규를 쏟아낸 덕분에, 병실의 환자들은 모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퀭한 모습이었다. 아마 투약 시간이 끝나고 나면 바로 다시 잠에 빠질 것이다. 임혜진 환자는 아침도 먹지 않은 채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에 빠졌다기보다는 기절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몰골이었다. 준비된 환자복 중에서 가장 치수가 작은 옷을 입혔는데도 환자의 말라비틀어진 팔다리에는 지나치게 커 보였다. 어제 당직을 섰던 정 선생에게서 대략의 정보를 듣고 왔는데도, 담당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어…… 그럼, 심장암이라고 하시니까, 음. 참, 보기 드문 경우인데.”

담당의의 언어 구사는 레지던트를 막 졸업한 신입 펠로우답게 답답하고 어설펐다. 베테랑 간호사로서, 나는 약간의 보조가 필요한 상황임을 감지하고 입을 열었다.

“일단 방사선 검사를 먼저 할까요? 당직 서신 선생님은 진통제랑 항생제만 처방하신 것 같던데.”

“아, 그렇죠. 그럼 일단 CT 먼저 찍을까요? 방사선과에 전화해서 일정 잡아주시고, 음. 정 선생님은 진통제랑 항생제만 처방했다. 일단 환자 의식이 돌아와야지 뭔가 얘기를 해볼 텐데…….”

“등록된 번호로 연락을 해봤는데 보호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아, 보호자는 아니고 비상연락처에 웬 초등학교 번호도 같이 쓰여 있던데.”

“초등학교요? 아, 이분 교사예요?”

나는 환자 기록의 가족관계란에 쓰인 한 남자의 이름을 보여주었다. 지영씨가 남긴 메모였는데, 임승재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와 환자의 관계는 자(子)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다.

“응? 잠깐만, 환자 나이가…… 스물일곱인데, 아들 나이가 아홉?아.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더……”

그 숫자들의 의미를 이해한 우리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희귀한 병의 마수에 걸리기에는 나이도 상황도 전혀 적합하지가 않았다. 담당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휴, 알겠습니다. 일단 좀 더 주무실 수 있게, 정 선생님이 수면제는 처방 안 하셨죠? 수면제 일단 드리고. 아들은 지금 어디 있대요? 새벽에 입원하셨으면 같이 있던 아들이 알았을 것 아니야.”

“제가 연락해 볼게요.”

나는 어려운 역할을 자원해서 맡았다. 오전 회진은 그렇게 찝찝하게 끝이 났다. 나는 핸드폰에 승재의 학교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스테이션의 구석으로 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직원에게 찾는 학생의 이름을 말하자, 직원은 전화를 교감 선생에게 연결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여기가 A 대학병원 암 병동인데요. 네. 임승재라는 학생이 혹시 있는지 여쭤보려고 전화 드렸어요. 지금 어머님이 갑자기 쓰러져서 여기 병원에 와 계시거든요.”

교감은 짧은 신음을 뱉으며 자신이 느끼고 있는 난감함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런 사정을 가진 학생이라면 학교 차원에서 특별하게 신경을 쓴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교감은 아이의 담임 선생을 연결해 줄 테니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첫마디를 듣자마자 바뀐 목소리의 주인이 젊은 여선생임을 알 수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담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승재가 지각을 했거든요. 왜 늦었냐고 물어보니 밤늦게 주인집 할머니가 급하게 현관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와서는 자기를 옆집으로 데려갔다고…… 아무래도 그분이 신고까지 해주셨나 봐요. 아, 어떡하죠? 일단 제가 당장 승재 데리고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병원 주소와 함께 6층 병동으로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데스크로 돌아오자 후배 간호사가 나에게 물었다.

“선배님, 방사선실에서 연락을 받았는데요, 환자 의식이 돌아오면 촬영 일정 최우선으로 잡아놓겠답니다.”

나는 알겠다는 사인을 보내고 자리로 돌아왔다. 임혜진 환자의 의식이 돌아오기 전까진, 그리고 담임이 아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오기 전까진 우리가 할 일은 더 없었다. 병동의 환자는 그녀 한 명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내심 감사함을 느끼며 다른 일들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직면하기 싫은 현실은 시선을 돌린다고 해서 나를 피해가지 않는 법이다. 한 시간 후, 예쁜 담임 선생님의 손을 꼭 붙잡은 귀여운 초등학생 한 명이 내 앞에 나타났다.

“선배님. 임혜진 환자 아들이 왔어요.”

가족이 없는 어머니가 아픈 상태라면 응당 아들이 보호자 노릇을 해야 했지만, 요즘의 아홉 살 인생은 보호자라는 단어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가녀렸다. 아이의 두려움에 가득 찬 눈은 자신을 데려온 성인 여성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아이만큼이나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죽음과 가까운 직업에 종사하다 보면 이상한 쪽의 감이 발달하게 된다. 나는 그녀의 앳된 얼굴을 보자마자, 담임이 이십 대 후반의 어린 나이임을 꿰뚫어 보았다. 또래의 여자가 겪고 있다기에는 그다지 현실감이 없는 사건들의 연속을 목격하면서, 그녀도 적이 놀란 눈치였다. 나는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6층 병동 주임 간호사입니다.”

“하아, 네. 승재 담임 선생입니다. 저, 어머님은 어디에?”

“지금 수면제 맞고 자고 계세요. 당분간 못 일어나실 겁니다. 바로 담당 의사 선생님께 전화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뇨, 제가 의사 선생님께 뭘 들어봤자 무슨 얘긴지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요, 뭘.”

엄밀히 말해 보호자라고 보기도 힘든 담임에게 담당의와의 면담을 요구하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사실 담당의라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환자의 어린 아들 앞에서는 차마 나눌 수 없는 얘기였지만 언젠가는 환자의 사후에 관한 얘기가 반드시 담임과 담당의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누구에게도 책임 소재가 없으며 아무도 책임을 맡고 싶어 하지 않는 그 난감한 상황을 중간에서 어떻게 견뎌야 할지 나는 고민했다. 어른들이 기껏 내린 결정은, 승재를 잠시 스테이션에 맡기는 것이었다. 그사이 담임은 나의 설득을 따라 담당의와의 면담을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 본인이 책임을 지기가 부담스럽다고 해도 학교 측에 학부모의 상태를 정확하게 전달할 의무는 있었으니까. 수간호사는 특별히 나의 오전 업무를 통으로 떼 주어 승재를 보살피라는 임무를 주었다. 내가 아이의 엄마와 같은 나이에 임신했다면 아마 내 자식과 비슷한 또래였을 아이. 상상력이 부족한 어른은 학교를 조퇴하고 병원에 온 아이의 마음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나는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뻔하디뻔한 형용사 사이에서 방황할 뿐이었다. 고심 끝에 나온 말이라곤 음료수를 권유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승재, 목마르지 않니? 누나랑 저기 자판기 가서 음료수 하나 뽑아 먹을래? 승재는 콜라가 좋아? 사이다가 좋아?”

승재는 아장아장 걸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사이좋게 콜라와 사이다 한 캔씩을 손에 들고, 우리는 하늘 정원으로 가 벤치에 편하게 앉았다. 아이에게 해줄 말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는 어른은 계속 먹을 걸 줘야겠다는 천박한 생각 말곤 떠올릴 수가 없었다. 지영씨한테 전화라도 해볼까. 지금쯤이면 침대에 곯아떨어져 있겠지? 이 나이까지 아이를 가지지 않은 우리 부부의 나태함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아, 하늘이 정말 맑네. 승재 이런 날이면 친구들이랑 운동장 가서 공차기 좋겠다.”
  나의 실없는 소리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승재는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 놀라운 것이라도 발견을 한 듯 승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을 펼쳐 어딘가를 가리켰다.

“왜? 하늘에 뭔가 있니?”

“달, 달이에요! 낮인데 달이 보여요!”

승재의 손가락 끝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은은한 흰색으로 빛나고 있는 달의 실루엣이 걸려 있었다. 나는 마침내 자신감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는 주제를 찾은 것이 반가워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신기하니? 누나도 고등학교 다닐 때 배운 건데 말이야, 달이 초승달 위치에 있으면 간혹 낮에도 저렇게 보일 수가 있대. 승재는 달이 밤에만 보이는 건 줄 알았구나?”

“아, 아니요. 알고 있었어요. 지금은 오전 10시니까, 낮에는 남동쪽 하늘에 달이 보이는 게 맞아요. 이따 해가 질 때쯤 되면 달이 정 남쪽에 걸려 있을 거예요.” 

승재가 뱉은 말들이 초등학생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을 만한 수준의 내용은 아니라는 것쯤은 간호사라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영특하고 재주 많은 아이가 과연 앞으로 있을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고 자신의 능력을 개화할 수 있을까. 똑똑해서 더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아이였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승재는 참 똑똑하네. 천문학에 관심이 많구나?”

“천문학이 뭐예요?”

“음…… 굳이 말하자면 하늘에 뜬 별과 행성들을 연구하는 분야랄까? 태양이나, 뭐, 금성, 화성, 목성 같은 것들? 간호사가 그걸 전문으로 공부하는 직업은 아니라서, 하하. 누나도 사실 잘 몰라.”

대답이 불만족스러웠는지 승재는 귀엽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는, 별에는 관심 없어요. 별 안 좋아해요.”

“그래, 누나가 잘 몰라서 미안해.”

“저는 달이 좋아요. 달만 좋아해요. 다른 건 잘 몰라요.”

승재는 친구에게 짝사랑을 고백하는 남학생처럼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요령 없는 간호사야, 너는 왜 또 아이를 이렇게 몰아세워서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니. 자책에 빠진 나를 구해준 것은 면담을 마치고 올라온 승재의 담임 선생과 담당의였다.

“저, 일단 어머님 깨어나시기 전까진 승재를 스테이션이 계속 데리고 있기로 했어요, 주임님. 여기 담임 선생님께서는 학교로 가서 상황을 전달하기로 하고.”

“아, 알겠어요. 아이는 우리가 잘 보살피고 있을게요.”

담임은 비로소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어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못내 씁쓸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담임을 보내고 자리에 남은 담당의 역시 참담한 표정으로 내 옆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저기, 승재야. 잠시 안에 들어가서 다른 간호사 누나들한테 가 있어? 누나 화장실만 갔다가 금방 갈게? 혹시 핸드폰 있니? 없으면 내 거 줄 테니까 시간 보내고 있어.”

승재가 쫄래쫄래 건물로 들어가고 마침내 둘만 남게 되자 담당의는 나에게 벤치에 앉아서 얘기할 것을 권했다. 그는 먼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덩치는 곰 같은 남자가 무슨 한숨을 그리 크게 쉬어요?”

“주임님, 아니, 자기야. 나 오늘 처음으로 내 직업에 회의를 느꼈어.”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그것도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떡하니 있는데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는 무력감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이 착한 남자가 견뎌내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감정이었다. 나는 그의 오른손에 깍지를 끼고 물었다,

“정확히 어떤 상황이야? 저 선생은 뭐래?”

“뭐, 당신도 차트 보고 어느 정도 짐작은 했겠지만, 아이 엄마는 미성년자일 때 임신했고, 아빠는 어디 갔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야.”

“……흔한 사연이네. 병원에서는.”

“어차피 교사한테 의학적인 얘기를 해봐야 소용이 없으니까, 혼자 남은 아이를 어떻게 할 건지 얘기했어. 애가 친척도 없대. 참나, 교사들도 참 이기적이야? 고민도 안 하고 바로 고아원 얘기 나오더라?”

“뭐, 그쪽은 그게 최선일 테니까. 솔직히 욕할 문제는 아니지.”

담당의는 두 손을 포개 얼굴을 덮고는 벅벅 문질렀다. 답답함과 짜증을 느낄 때 나오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아니, 그래, 나도 그건 알지. 그래도, 언젠가 꺼낼 수밖에 없는 말이라도 하기에 적합한 순간이 있고 적합한 장소가 있잖아? 그래도 선생이면, 현실적인 얘기로 넘어가기 전에 뭐라도…….”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끊은 지 3주밖에 되지 않은 담배를 찾기 위한 습관적인 동작이었다.

“에휴, 그래 이게 다 오지랖이지 뭐야, 들어가자. 할 일 많잖아.”

담당의는 벤치에서 먼저 일어나 나를 일으켜 세워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을 잡지 않고 하늘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까 승재가 보고 있던 그 지점으로. 달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희미한 흰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임혜진 환자는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다행히 아직 남아있는 진통제의 영향으로 고통의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녀는 잠시 눈을 껌벅거리며 자신이 있는 장소가 어딘지를 확인한 후에, 맥박과 혈압을 확인하는 내 옷자락을 붙잡고 아들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손아귀에는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두 눈에 담긴 절박함의 이글거림은 내 눈에도 생생히 보일 것만 같았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해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승재는 괜찮아요. 일단 진정하시고, 환자분? 지금 본인 걱정을 먼저 하셔야 해요. 이제 일어나셨으니 바로 CT부터 찍으러 가야……”

환자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자신의 가슴 위로 가져갔다.

“굳이 안 찍어봐도 알아요.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저, 간호사님.”

“네?”

“제 담당 의사 선생님께 긴히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네. 그러니까 CT 촬영하면서 말씀하세요. 제가 일정 잡아드릴게요.”

CT 촬영보다도 의사와의 면담이 더 절박했던지 그녀는 내 설득을 더 듣지도 않고 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병실을 나온 나는 담당의에게 전화를 걸어 환자의 면담 요청을 전했다.

그리고 1시간 후 임혜진 환자는 촬영과 면담을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의사와의 면담이 그렇게 절박하게 필요했는지 호기심을 지울 수 없었다. 면담은 짧게 끝난 모양이었다. 1층의 간호사 두 명이 환자가 누운 침대를 끌고 6층으로 올라왔다. 환자를 인계받아 다시 병실에 넣어준 후 나는 담당의에게 문자를 보내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퇴근하고 얘기해 주겠다는 답을 보냈다. 일과를 마친 후, 나는 다음 근무조의 후배들에게 임혜진 환자에 관한 주의사항을 철저히 인수인계 해주었다. 평소라면 곧장 퇴근 버스에 몸을 실으러 갔겠지만, 오늘은 지하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담당의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 차에 올라서 본 그의 얼굴은 어지간히 고민이 많은 모습이었다.

“오늘 아주 바쁘네? 담임 면담도 하고 환자 면담도 하고. 뭐래?”

“자기야. 우리 결혼하기로 한 사이 맞지?”

우리의 결혼 문제가 환자와 나눈 얘기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몰랐지만, 나는 우선 그렇다고 대답했다.

“근데 우리 애를 낳아야 하잖아. 결혼 전이든, 하고 나서든.”

“아, 답답하니까 그냥 빨리 말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혹시 내가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하면, 그래도 당신은 나하고 결혼하고 싶을 것 같아?”

참 당신다운 발상이다. 머리로는 예상하지 못했으나 직감은 어느 정도 이런 전개를 예상했던 것 같다. 나는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침착한 반응을 보였다. 그 잔잔한 침묵을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담당의는 우물쭈물 내 눈치를 보고만 있었다.

“승재 얘기야?”

그는 눈을 끔뻑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너무 갑작스러워서, 일단 생각을 해봐야겠는데. 당신은 그 애가 어떤 애인지도 모르잖아. 입양한다는 건 걔 인생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말인데, 충동적으로 내릴만한 결정은 아니야.”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이 순하기만 한 남자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애가 너무 불쌍해서 그래? 부모 의사는 물어봤어? 그 환자가 간곡하게 부탁한 거야?”

“아, 아니야. 환자는 그런 부탁 안 했어. 그냥, 어차피 오래 못 살 거 아니까, 진통제 가장 강력한 것들로만 한 달 치 처방해 달라고. 밖에서 최대한 버티면서 아이 받아줄 고아원 직접 찾아다닐 거라고. 하지만 맹세할게, 절대 동정심에서 내린 결정은 아니야!”

“그럼 어떤 이유에서 그러는데?”

의도치 않게 추궁의 형태를 띤 대화가 되었으나, 나는 속으로 그가 나의 마음을 울릴 만한 대답을 해주기를 소망했다. 나 역시, 달을 좋아하는 이 총명한 아홉 살 인생에 개입하기를 어렴풋이 원하고 있었다. 물론 나의 동기 역시 동정심은 아니었다. 누구나 머릿속에 계산기 하나씩은 달고 사는 마당에, 동정심이라는 요소가 다른 모든 마이너스 인자들을 영으로 만들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그 하나만으로 떠맡기엔 너무 큰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내 물음에 적당한 답을 찾느라 오랫동안 말이 없던 남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용기를 내야 하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뭐?”

“용기를 낼 필요가 있었다고. 의사로서가 아니라, 어른으로서.”

용기. 내 마음의 한 곳을 푹 찌르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단어. 내*심 타인에게서 듣고 싶은 말을 들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후련함이 있다. 나는 곧 남편이 될 남자에게서, 망설이는 지금의 나에게 용기를 내라고 일갈하는 한 간호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 간호사의 뒤로, 아침에 본 어린이집과 꿀밤을 맞고 머리를 문지르는 조카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핸들 위에서 방황하는 담당의의 오른손을 꼭 감싸 주었다. 간호사가 아니라 어른으로서, 삼십 중반 인생에 처음 느껴보는 무거운 책임감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우리는 그날 저녁을 내 집에서 함께 보냈다. 신해철의 노래 가사처럼 서로에 머리를 기대어 앞으로의 일들에 관해 얘기하고 사랑을 나눴다. 다음날, 어제의 고양감에서 깨어난 우리는 좀 더 현실적인 영역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아무리 우리가 좋다고 해도 결국 엄마랑 아이가 싫다고 하면 안 되는 문제잖아. 환자를 어떻게 설득할 거야?”

“보자, 나 오늘 출근하고 내일 비번이니까. 음.”

“나는 오늘 당직이라서 밤샘 근무하고.”

“음, 일단 개인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은 내가 더 많을 테니까 오늘 한 번 얘기 꺼내 볼게. 당신은 티 내지 말고 있어줘.”

합의를 본 우리는 아침을 먹은 후 차를 타고 함께 출근했다. 평상시보다도 더 기대감이 많이 차오르는 출근길이었다. 지하 주차장에 먼저 내린 나는 남편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6층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남편은 1층으로 출근해야 해서 차를 대고 걸어가겠다고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여전히 피곤한 모습의 야간조 후배들이었다.

“고생했어, 지영씨. 퇴근, 퇴근!”

조례를 시작한 오전 8시부터 오후 근무가 끝난 오후 5시까지,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애써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와 우리의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할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스타트업을 하고 싶다는 조카의 심정이 이랬을까 싶었다. 다행히 임혜진 환자도 거의 발작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그 고통을 참아내는 정신력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주임님 고생하세요!”

당직 근무자를 제외한 나머지 간호사들은 서둘러 스테이션을 떠났다. 저녁 시간이 지나고 밤이 찾아온 병동은 유난히 조용했다. 스테이션에 홀로 남아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어두운 복도 저편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화장실 가는 환자겠거니 하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려던 나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환자의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어머, 혜진 씨! 괜찮아요? 혼자 걸을 수 있겠어요?”

“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직 다리는 쓸만하니까.”

“하하, 다행이네요. 화장실 가세요?”

“아뇨, 저…… 간호사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잠시 거기 옆에 앉아도 될까요?”

환자의 스테이션 출입은 당연히 금지된 사항이었지만 이 환자의 요청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의자를 끌어다 놓아 내 옆에 그녀를 앉혔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나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말주변 없는 그 곰 같은 남자가 환자를 잘 설득한 모양이었다. 고마운 건 오히려 나였다. 아무리 곧 죽을 운명이라지만 엄마로서 자기 자식을 다른 이의 손에 맡긴다는 결정을 선뜻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볼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렇게 그녀를 대면하고 나서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내가 동정심에 휩쓸려 섣부른 결정을 내리지 않았음을, 그녀를 보면서 다시 한번 확신했다. 혜진 씨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결코 연민이 아니었다. 원치 않은 임신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감내해 내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아이의 존재로 인해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시련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용기를 발휘했다. 아이로 화제가 옮겨가자, 혜진 씨의 얼굴에는 전에 본 적 없는 화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전 행복해요. 그렇게 살았어도,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잖아요. 제 또래 여자 중에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혜진 씨는 스테이션에 걸린 벽시계를 보고 말했다.

“간호사님, 괜찮으시면 잠시 정원에 나가보시지 않을래요?”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담요를 챙겼다. 나도 그녀도 쌀쌀한 밤공기를 견뎌내기엔 너무 팔이 가늘었다. 내친김에 보온병에 따뜻한 커피까지 채워서 나가고 싶었지만, 혜진 씨의 소리없는 재촉에 커피를 챙길 겨를은 없었다. 하늘 정원으로 나온 나는, 하늘에 걸린 밝은 보름달을 보자마자 그녀가 밤 산책을 제안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엄마나 아들이나, 달 좋아하는 건 똑같다고 생각했다.

“승재가 달을 참 좋아하죠?”

“네. 낮에 보이는 희미한 달을 보고도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요, 천체 쪽에 관심이 많은 거면 월급 털어서 망원경이라도 사줘야 할까 봐.”

혜진 씨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재는 별을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걘 그냥 달만 좋아해. 왜 달이 좋냐고 물어봐도, 뭐 알아먹기 힘든 소리만 해대고…….”

나는 승재가 달을 좋아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달에 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은 일반적인 상식 수준의 내용뿐이었다. 나의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승재가 달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애가 달을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뿐, 밤하늘의 가장 좋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채 영롱하게 빛나는 보름달을 바라보니, 문득 달이 승재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달은 지구 주위를 도는 위성이지. 절대 벗어날 수 없고, 지구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마찬가지로, 지구도 달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승재의 지구는 이제 그 기력을 다하고 소멸하기 직전에 와 있었다. 나는 곁에 앉은 쇠락한 행성의 손을 말없이 붙잡았다. 행성이 사라져도 달은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내가 그의 새로운 지구가 되어줘야겠다. 흔들리지 않고 내 곁을 돌 수 있도록, 단단하고 듬직한 지구가 되어줘야 한다. 눈부시게 밝은 보름달의 빛을 받으며, 벤치에 앉은 두 여자는 곤히 자고 있을 어린 달의 모습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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