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탈주민 3만 명 시대여전히 허물지 못한 사회 속 38선

북한이탈주민은 ‘북한을 탈출해 북한 이외의 지역에 체류하고 있는 북한 주민’을 의미한다. 그들은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목숨을 걸고 탈북을 선택했다. 하지만 탈북 후 마주한 사회는 예상과 달랐다. 미흡한 지원제도와 편견으로 인한 어려움으로 끝내 
정착하지 못하고 남한을 떠나는 북한이탈주민도 많다. 이에 <부대신문>에서 북한이탈주민이 처한 상황과 대안을 알아봤다. 

 

북한이탈주민 안소진(해운대구, 39) 씨
한국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이 3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그러나 여전히 보호받지 못하는 북한이탈주민이 많다. 이에 북한이탈주민 안소진(해운대구, 39) 씨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탈북을 결정하게 된 계기와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

탈북을 두 번 경험했는데, 두 번 다 살아남기 위해서 탈북을 결정했다. 처음 탈북을 했던 1998년에는 엄청난 식량난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장마 기간에 탈북을 하면서 중국으로 넘어가기 위해 물이 불어있던 두만강을 건너야 했다. 다른 사람들까지 합쳐서 총 12명이 함께 건넜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도착해서 보니 옷은 다 찢어지고 발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한 명도 낙오 없이 무사히 강을 건너왔다.

중국에 도착하고 나서도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 돈이 없어서 이동할 때 택시나 버스를 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처음 도착하고 12일 동안은 산과 강에 있는 무, 배추, 감자 등을 먹으며 겨우 버텼다. 당시 18살이었는데 신분 없이 숨어사는 것도 순탄치 않았고 부모님 생각도 많이 나서 더욱 힘들었다. 차별도 많이 받았고 언어가 달라 대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다시 북한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생각으로 2002년에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북한으로 돌아가서 심문을 받게 됐다. 중국에 정착했던 5년간 북한은 많이 바뀌어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동안의 북한을 알지 못했고 결국 감옥에 7개월 정도 수감됐다. 감옥에 있으며 생애 처음으로 자유를 갈망하게 됐다. ‘그래도 내 나라’라서 다시 돌아온 북한이었는데 감옥살이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사라지게 됐다. 끝내 자유를 갈망했던 나는 다시 탈북을 했고 중국에서 또 한 번 가짜의 나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 2번째 탈북 이후 어떻게 지냈는지?

다시 5년간 중국에서 지냈다. 첫 탈북 때와 같이 신분이 없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었다. 그러던 중 지금의 남편이 신분을 만들어 유럽에서 살자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유럽으로 가서 살게 됐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언어와 문화적 차이가 커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중국에서도 중국어를 익히느라 애를 먹었는데 유럽에서 다시 말을 배우고 적응하려니 두려움도 컸다. 

그러던 중 북한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이 남한에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어가 통하니까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고민 끝에 2012년에 남한으로 왔다. 그런데 오고 나니 중국, 유럽 등 자본주의 국가의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비보호대상자가 됐다. ‘비보호대상자’이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해서 앞이 막막했다. 북한이탈주민의 사회정착 지원기관인 하나원도 2개월 정도만 머물렀고 그 후로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어떤 조건에도 부합하지 못해 초기정착을 위한 아파트지원비조차 받지 못했다. 

△ 남한으로 오고 나서의 정착과정은 어땠는지?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은 부분이 거의 없었다. 기본적인 정보조차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해 스스로 인터넷 검색을 하며 정보를 찾아야 했다. 무언가를 해보려 해도 돈이 없어 자금 마련을 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통장을 만들지 않아 신용등급이 없어 대출도 받지 못했고 사업장도 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신용카드 대출이었다. 이것이 큰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당시에는 그저 누군가가 돈을 빌려준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에 원금까지 매달 갚아 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신용카드 대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소문한 끝에 남북하나재단이라는 곳을 알게 됐다. 이곳에서 금융 관련 재단을 소개해줬고 다행히 카드대출 관련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또한 창업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금전적인 지원은 여전히 받지 못했지만 창업에 대한 전문적인 상담을 받는 것은 가능했다. 전문가는 여러 방안을 함께 고민해줬다. 덕분에 작년에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장사를 시작하고 나서는 아이때문에 저녁장사를 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다. 어린이집에 맡겨도 오랜 시간을 돌봐주지는 않았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입장이다 보니 맞벌이를 하는 부부들이 부모님에게 아이를 맡기는 부분이 부러웠다. 창업 전, 동사무소에 돌보미 신청을 했는데 2년 정도가 지난 뒤에야 연락이 왔다. 이미 저녁 장사를 안 하기로 마음먹은 상태라 돌보미를 취소했다. 

△ 최근 일어난 ‘탈북민 모자 사건’에 대해서 북한이탈주민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자 사건이 일어난 후, 8월 말쯤 얼마 지나 장례식에 참석했다. 엄마가 40대 초반으로 나랑 비슷한 나이대라서 공감이 많이 됐던 것 같다. ‘아이하고 죽음을 맞이했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지금도 제대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 다들 ‘아사’가 원인임을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냥 사회가 무관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사무소도 관심을 갖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렇게나 오래 집세가 밀려 있는데 어떻게 한 번을 찾아갈 생각을 안 했을까. 전화라도 한 번 했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어린이집에서도 숱한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손을 벌려도 거절만 돌아오는 환경이 그들이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든 것이 아닌지 추측해본다. 나도 내성적인 성격이라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쉽지 않다. 동사무소에서는 기초 수급자로 배정되고 이혼까지 해야 했던 당사자는 오죽했을까. 북한에 살 때 사흘 정도 굶은 날이 있었다. 마실 물조차 없어 먹을 것을 조금이라도 얻어 보려 밖을 나섰는데 수돗물을 팔고 있었다. 사카린을 섞은 단물이었다. 그거라도 얻어보고 싶었지만 거절당하면 민망할 것 같아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모자들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같은 탈북민으로써 도와주지 못해 죄책감을 느낀다.알고 있었더라면 도와줬을 텐데 사건을 듣고 매우 속상했다. 

△ 남한에 와서 겪는 어려움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북한이탈주민이지만 기준을 맞추지 못해 비보호대상자가 됐다. 이 때문에 국가로부터 지원을 거의 못 받았다. 중국어 공부를 해보고 싶어 바우처 카드를 만들기 위해 이의신청을 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외에 다른 지원도 비보호 대상자라는 이유로 신청을 할 수 없어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같은 언어를 쓰지만 외래어가 많아 어떤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대부분의 탈북민이 언어 차이로 어려움을 겪는다. 하나원에서 기초적인 외래어를 배우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았다.  

한번은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서 과자 심부름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북한에는 없는 과자여서 그 과자를 알지 못했고 결국 사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같이 일했던 언니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그것도 모르냐’고 말했는데 당시에 굉장히 상처가 됐다. 이후에 다른 동료들과 ‘소진이는 이 과자를 모른다’며 수군거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 과자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나서 요즘도 울컥한다. 그 이후로 모르는 게 있어도 물어보기가 더 어려웠던 것 같다. 혹시나 일부러 힘든 일을 시킬까 봐 눈치 보며 일했던 기억이 많이 난다.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가게를 처음 오픈했을 때는 ‘이탈주민’이라는 사실을 숨겼었다. 내가 탈북민이라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던 것 같다. 숨길수록 사람들이 조선족인지 아닌지 궁금해했다.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도 꽤 들었다. 그럴 때마다 북한이라고 말하기보단 강원도에서 왔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나도 이제 대한민국 국민인데 왜 아직도 그런 질문들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악의가 없었겠지만 나에게는 꽤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 나라로부터 지원받은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비보호대상자였기 때문에 창업을 위한 컨설팅을 받은 것이 전부다. 비보호대상자는 아무것도 신청하지 못한다.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싶어 바우처 카드를 만들기 위해 이의신청을 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우처는 탈북민이 아니어도 받을 수 있는 거였다. 비보호 대상자라는 이유로 어떤 금전적인 도움도 받지 못하고 신청도 못한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립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내 힘으로 사는 게 제일 나은 것 같다고 느꼈다. 누군가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니까.

△ 북한이탈주민으로서 국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사람마다 생각과 능력이 달라서 무조건 이런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탈북민들이 기초적응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할 때까지는 도와줬으면 좋겠다. 한성옥 씨 모자 사건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다. 탈북민 단체가 많고 지원이 다양하지만 이를 몰라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정보를 알려주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탈북민과 국가의 중간다리인 탈북민지원재단이 제 역할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뿐만 아니라 남한에 사는 3만 명 정도의 탈북민들도 스스로 의지를 다지고 열심히 살아나갔으면 한다. 탈북민들 중에는 쉽게 남한으로 온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들 각자의 사연이 있고 목숨을 걸고 온 사람들이다. 그때 그 마음 그대로라면 남한에서도 못할 게 없다고 본다. 한성옥씨 모자 사건을 보며 무조건 내 힘으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한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열심히 살면서 버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북민들이 못 살 이유가 하나도 없다. 더 잘 살 수 있으니 탈북 당시 그때 그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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