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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실패한 개혁가의 이야기
  • 함규진 (서울교육대 윤리교육) 교수
  • 승인 2019.10.20 03:01
  • 호수 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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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서울교육대 윤리교육) 교수

“당신은 늘 개혁을 주장해오지 않았소? 당신이야말로 개혁의 적임자요. 부디 내가 당신을 그 자리에 임명한 뜻을 살려, 오랜 적폐를 청산하고 우리나라에 빛을 가져오기 바라오!”

아주 최근의 임명권자가 고위공직자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다. 1583년 병조판서 자리에서 물러나려는 율곡 이이를 만류하며 선조 임금이 한 이야기다. 물론 현대에 맞게 표현을 조금 고치기는 했지만, 4백 년도 더 옛날의 이야기가 요즘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일까.

‘구도장원’, 보통 사람은 평생에 한 번 하기도 장원급제를 아홉 차례나 했다고 하는 조선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하나인 율곡 이이. 그런 만큼 삐딱한 면도 있었던 것 같다. 서애 유성룡은 그를 가리켜 “이이는 머리가 뛰어나지만 자기주장이 너무 세고 말이 온화하지 않아 미움을 샀다. 무엇보다 매번 개혁, 개혁만 이야기하니 사람들이 싫어했다”라고 회상했다. 그의 가장 든든한 뒷배였던 선조 임금조차도 하도 집요하게 개혁을 주장하며 “임금께서는 성군이 되실 자질이 없다고 여기십니까? 전혀 아닙니다! 게을러서 노력을 안 하셔서 그런 겁니다!”라고 독설까지 퍼부어대니, 그만 질려서 한때 그가 사직한다는 소리에 “그가 똑똑한지는 몰라고 성품이 교만하고 과격하니, 인격 수양을 좀 하고 돌아와도 좋으리라”라고 냉소하기도 했었다.

그런 천재성으로 임진왜란을 미리 내다보고, ‘10만 양병’을 주장했다가 ‘정신 나갔다’는 비난만 듣고 좌절했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조선의 국방체제가 문제가 많다는 사실은 조정 신하라면 두루 알고들 있었다. 병농일치제를 택해 따로 상비군을 키우지 않고 일반 백성들이 돌아가며 군역을 치르고, 유사시에는 모두 동원돼 전쟁에 나가도록 한 것이 조선의 국방체제였다. 그러나 평화가 오래 이어지고 처음에는 함께 군역을 지던 양반들이 은근슬쩍 발뺌을 하다 보니 일반 백성들도 병역 지기를 싫어했다. 누구 좋으라고 농사일을 팽개치고 몇 년씩 머나먼 변방에 가서 고생해야 한다는 말인가? 대립군이라 해서 돈 주고 대신 병역을 지게 하거나, 아예 뇌물로 병역에서 빠지거나 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16세기 말에는 병적 상으로는 100명이 있어야 할 군부대에 실제로는 한두 명밖에 없는 일도 많았다. 이래서야 전쟁이 났을 때 제대로 대응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이가 내놓은 국방개혁안은 10만 병사를 키운다는 구체적인 숫자는 들지 않았지만, “백성들이 먹고살 만해야 병역에도 선뜻 응할 것이니, 공납의 폐단을 없앤다”, “노비나 백정 같은 천민이라도 변방 복무에 자원하면 양인으로 신분 상승시킨다”, “고을 사또를 오랫동안 자리 지키도록 해서, 전시에 고을 주민을 효과적으로 지휘하도록 한다”, “무과 급제자도 우선적으로 변방 근무에 내보낸다” 등등의 양병책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개혁안은 고위층의 반감을 샀다. 신분제 변동도 싫었고 공납제 변혁으로 중간에 갈취하는 이익이 없어지는 일도 싫었다. 또한 고을 수령은 잠시 경력 쌓기용으로 하다가 중앙에 올라와 출세 가도를 달려야 할 텐데, 몇 년씩 시골에서 썩으라고? 무과 급제자는 고위층 자제도 꽤 되는데 험한 변방에 먼저 내보내라고? 그들은 당연히 개혁에 반대였으나 그런 속내를 공공연히 드러내기에는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지를 공격할 수 없다면 메신저를’이라는 전법을 썼다. “이이는 교만하고 무턱대고 개혁만 부르짖는 경솔한 자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군정을 결정한다 합니다!”, “젊은 시절 불교를 믿었답니다!” 등등.

결국 신하들의 먼지털기식 총공세에 못 이겨, 이이는 판서직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1년쯤 뒤 숨을 거둔다. 이렇게 해서 실패한 국방개혁은 임진왜란을 겪고도 좀처럼 궤도에 오르지 못해 끝내 구한말의 약해빠진 국방력으로 이어진다.

결국 적폐 신하들의 몽니 때문에 개혁이 좌절된 걸까?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개혁이란 본래 기득권을 건드리고 반감을 사기 마련이다. 이이가 보다 신중하고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더라면? 가령 공격받기 쉬운 스스로는 뒤로 빠져 다른 사람을 내세워 개혁을 추진하고, ‘수령 오래 시키기’, ‘변방 먼저 보내기’ 등은 예외를 두거나 시범 시행부터 하거나 해서 반발의 격랑을 피해갔더라면?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반복은 있기에 안타까움이 인다.

함규진 (서울교육대 윤리교육) 교수  press@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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