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성(철학 석사 19)

기억상실은 트라우마의 주된 증세 중 하나라던데?“물론 선택적 기억상실의 혐의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아무래도 지난 보름간 우리 학교에서 펼쳐졌던 조악한 촌극은 모두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된 모양이다. 학생들은 과연 섹시한 젖꼭지란 무엇인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뇌하거나 혹은 독서실 칸막이 기댄 채로 직무적성 검사 기출유형을 풀어대고 있고, 늙은 교수들은 우롱차를 타 마시며 애써 쉬쉬하고 있다.(“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이 그럴 리가 없다네!”) 원래 보던 풍경처럼 넉터에서 축구공이 굴러다니고 있으니, 어쩌면 정말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역시나 일상의 관성이란….

그러나 억압된 것은 어차피 회귀하기 마련이고, 욕망은 당신이 좋든 싫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 지난 8월 28, 29일에 개시된 총투표는 19,524명 중 9,934명이 참가했으며 이 중 9,085명이 찬성하면서 사실상  만장일치의 기염을 토해냈었다. 이렇게나 압도적인 여론이라니, 누군가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반인륜적인 범죄라도 저지른 것일까? 놀랍게도 투표 사안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조국이 아니라 무려 그의 ‘딸’말이다!”-에 관련된 의혹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총학생회 주도로 개최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9,085명의 익명의 찬성자 중에서 9월 2일 실제로 1차 시위에 나온 것은 1~200여 명 남짓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그날 비가 와서 그랬나? (“아무렴 투철한 정치적 주체들께서도 산성비로 인한 탈모가 걱정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유감스럽게도 2, 3차 시위 때에는 100명조차 되지 않을 만큼 더욱 쪼그라들었다.

단순히 멍청해서 벌어진 일인가? 무지는 필요조건이므로 물어봐야 할 것은 언제나 충분조건이다. 표준적인 좌파 지식인들처럼 부르디외를 인용해주면서 교육과 계급의 상관관계에 대한 가르침을 읊어주면 될까나? 확실히 그것이 모범답안이긴 하지만, 동시에 이런 식의 계몽주의는 너무 순진하다. 이건 마치 1979년에 나온 <구별짓기>를 읽으면 2019년이 해결될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물론 맑스가 거세된 사회철학이 동화책 냄새를 물씬 풍기게 된 일이야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그곳은 하드보일드한 피터팬들의 네버랜드죠!”-안타깝게도 촛불집회 당시 아무도 오지 않는 외부인을 경계하며 텅 빈 넉터의 제한선을 지키던 총학생회 위원들의 형상이란 주지주의를 훨씬 초과하고 있다. 이건 흡사 카프카식 부조리가 아니던가?

그날 넉터의 공허로부터 현현한 것은 정치적 무기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국 후보자의 딸에 대한 가짜뉴스들을 모두 밀어내고서 닿게 될 진짜 문제는 절차적 정의의 공허함, 즉 계급일 텐데, 당신은 포스트모던한 항우울제를 중단할 자신이 있는가? 진리에 눈과 귀를 닫고서 자소서나 쓰게 될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를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럴 바엔 처음부터 닥치고 일상에만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가 아닐까-?“너무, 너무 바빴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상처도 받지 않을 것이란 9,085명의 강박증자들의 주기도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아멘, 아멘”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