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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갈망한 부산의 시월을 돌아보다
  • 김정윤, 김유정 기자
  • 승인 2019.10.13 14:46
  • 호수 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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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6일 우리 학교 도서관 앞은 평소와 달리 수많은 학생이 모여 있다. 박정희 정부의 반인권적 행태에 많은 학생이 분노한 것이다. 학내에 경찰이 들어서자 이들은 학교 밖으로 이동하려고 한다. 경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부산 시내로 진출했다. 이어 학생들은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친다. 수많은 시민이 그들을 격려하며 시위대 행렬에 동참하기 시작한다.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대의 시내 진출을 저지하는 경찰의 모습

 

우리 학교와 타 대학교 학생들 그리고 시민들이 남포동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채증 경찰이 시위 현장을 촬영하고 있다
부산 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


민중들의 불만과 저항이 커지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2년간의 군정으로 국가를 집권한 후 대통령직선제로 다시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헌법>에 대통령의 3선 금지 조항이 명시돼있어 대통령을 더 이상 역임하지 못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또한 1972년에는 <헌법>을 개정해 정권을 장기집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재정권을 꾀한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운동이 일어난다. 운동의 규모가 점차 커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긴급조치로 탄압한다. 그 결과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고문을 당하거나 구속됐다. 우리 학교의 경우 ‘민청학련사건’과 ‘재일교포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인해 학생운동 세력에 피해가 있었다.

1970년대 후반 박정희 정부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를 시작으로 반정부적 성격의 유인물이 대학가에 살포되는 등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는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78년 우리 학교에서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성을 비판하는 ‘부대 자율화 민주실천선언서 사건’과 ‘부대 페인팅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경제가 어려워져 서민의 불만이 고조되기도 했다. 부동산 투기로 집값이 폭등해 부산 지역에 인구가 많이 몰려 시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외에도 오일쇼크로 인해 경공업이 발달한 부산과 마산 지역에 경제적 타격이 있었다. 당시 경공업 노동자들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을 전개했으며, 동일방직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을 해결하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당시 미국과의 외교상황도 좋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는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주한미군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특히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인권 외교 정책을 내세우면서 박정희 정부에 압박을 가했다.

마침내 1979년 부마민주항쟁의 뇌관이 터지기 시작했다. 1979년 8월 YH무역에 일하던 여공들이 기업의 일방적인 부당해고에 반발해 신민당을 점거해 농성을 펼쳤다. 박정희 정부는 공권력을 이용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진압했다.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여공 한 명이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폭압성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일었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 의원을 제명했다. 외신기자에게 했던 발언을 빌미로 삼은 것이다. 이에 김영삼 의원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던 부산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당시 우리 학교 상과대학 건물 앞에서 시작됐다. 1979년 10월 15일 우리 학교 학생 이진걸은 부대 자율화 민주실천선언서 사건에 영향을 받아 ‘민주선언문’을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우리 학교 학생 신재식도 ‘민주투쟁선언문’을 제작해 본관 강의실과 미리내 골에 뿌렸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10월 15일의 시위가 실패로 돌아가자 많은 학생이 아쉬워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우리 학교 상대에 재학 중이던 정광민 학생이 상대 학생들과 선언문을 제작해 16일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다. 10월 16일, 오전 9시 30분경 정광민 학생은 경제학과 강의실에 들어가 준비한 선언문을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이제 나가서 피 흘려 투쟁하자’며 외쳤다.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위를 하러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이들은 상대를 거쳐 도서관을 향해 나아갔고 시위대를 본 학생들도 하나둘 참여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시위대는 2,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학내 상주하던 경찰이 시위대에게 최루탄을 발사했고 학생들을 곤봉으로 진압당했다. 

경찰에게 쫓겨 해산된 시위대는 문창회관과 도서관 앞으로 다시 모였다. 이들은 연장 시위를 하기 위해 시내로 전진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자 학생들은 부산역과 시청 앞에서 다시 집결할 것을 약속하고 해산하게 된다. 오후 2시경 광복동의 부영극장 앞과 미화당백화점 앞 학생들의 시위가 다시 시작됐다. 학생들이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자 시민들은 열렬하게 학생 시위대를 지지했다. 경찰기동대는 다시 시위대를 진압했고, 학생들은 경찰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재집결하는 방식으로 시위를 이어갔다. 저녁이 되자 시민들이 시위에 대거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시위가 격렬해졌다. 이날 시위로 학생 282명과 일반인 118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우리 학교의 시위 소식을 들은 동아대학교 학생들도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10월 18일 자정, 시위가 더 거세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고 계엄군이 부산에 출동했다. 하지만 언론통제가 철저하게 이뤄져 대다수의 언론은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방송사 <CBS> 만이 시위가 발생하자 4차례에 걸쳐 단신으로 이 소식을 알렸을 뿐이다. 당시 주요 언론은 박정희 정부의 발표 그대로 시위를 보도했다. 

부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다. 1979년 10월 18일 경남대학교에 부산의 시위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당시 경남대학교 학생이었던 한국정치사회연구소 정주신 소장은 “18일 점심시간이 되니 부산에서 시위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라며 “이에 우리 학교에서도 시위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경남대학교는 학내 분위기가 좋지 않자 14시 15분경 휴교를 결정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서관 주위로 모였다. 이들은 경찰이 진압하자 3·15 의거탑에 모여 학교 담을 뛰어넘거나 운동장 야산을 넘어 시내로 진출했다. 학생들은 창원 군청 앞 도로로 나아갔고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했다. 이후 18시경부터 19일 새벽 1시까지 시위대가 산발적으로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시위가 전개됐다. ‘유신철폐 독재타도’는 이들의 주요 구호였다. 다음날에도 학생들은 시위를 이어나갔다. 박정희 정부는 시위를 막기 위해 마산과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내리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19일 시위로 인해 총 288명이 검거됐고 故 유치진 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故 유치준 씨는 유일하게 부마민주항쟁에서 인정된 사망자다.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차지철 전 경호실장이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하며 유신정권은 막을 내린다. 이후 김재규가 쓴 항소이유서가 공개됐다. 항소이유서에 따르면 부산에 내려가 부마민주항쟁을 본 김재규는 순리적인 방법으로 해결책을 모색할 것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릴 것’이라는 발언을 해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설명했다. 

                                                       잊혀서는 안 되는 부마민주항쟁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했지만 시위 후반부터 시민들이 합세해 부마민주항쟁은 큰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10월 16일에 우리 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이어나가고자 시내로 나갔고 시민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 이에 대해 정주신 소장은 “시민들의 참여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일”이라고 전했다. 

부마민주항쟁은 다른 항쟁에 비해 희생자 수가 비교적 적어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평가절하를 받아왔다. 하지만 여러 항쟁 중 부마민주항쟁이 민주화를 위해 처음 시작된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정주신 소장은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중대한 역할을 했음에도 사건이 작게 여겨졌다”라며 “정권을 타도한 점에서 부마민주항쟁이 가지는 역사적 비중이 크다”라고 말했다. 또한 부마민주항쟁은 6월 민주 항쟁의 시발점이었다.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작성위원회 김선미 위원은 “6월 민주 항쟁과 부마민주항쟁은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고 시위에 참여한 사람도 거의 동일하다”라며 “이는 부마민주항쟁의 역량이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다는 증거”라고 전했다.

부마민주항쟁에서 ‘유신철폐 독재타도’가 일제히 사용됐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더한다. 민주주의사회연구소 차성환 소장은 “광범위한 규모의 시민들이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에 참여한 것은 유신체제 안에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며 “학생들 시위의 구호에서 유신 철폐 독재 타도가 선명하게 나왔던 것은 부마민주항쟁이 독보적이기도 했다”라고 부마민주항쟁의 구호를 평했다.

한편 역사적으로 소외돼왔던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서 올해가 돼서야 중요한 역사로 인정됐다는 지적도 있다. 올해로 부마민주항쟁은 40주년을 맞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이에 정주신 소장은 “부마민주항쟁이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고 자료도 많이 소실돼서 아쉽다”라며 “이번에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전했다.

김정윤, 김유정 기자  press@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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