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선(한국해양대 국제무역경제학) 교수

20여 년 전 미국 콜로라도 대학에 방문교수로 갈 기회가 있었다. 유학 경험이 없던 나로선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이 언어였다. 떠나기 전 나름 준비한다고 했는데 막상 박사과정 세미나에 참석하면 아는 내용만 들리고 새로운 내용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가장 난감한 것은 교수가 질문했을 때 그 질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마치 자신의 행동을 부모에게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 밖에서 배회하는 아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고 나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교착상태, 언어 때문에 내 존재가 이렇게 가볍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미국으로 갈 때쯤 운 없게도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환율이 2배 이상 치솟자 달러로 환산된 내 소득은 절반 이하로 쪼그라들어 미국 생활에서 의식주와 아이들 교육관련 비용 외에는 지불할 여력이 없었다. 어떻게든 영어 실력을 높여야 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공공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ESL(English Second Language) 프로그램이었다. 이것은 자원봉사자들이 외국인에게 제공하는 영어 향상 프로그램으로 한 주 3번씩 저녁에 수업이 진행됐다. 

나를 담당한 선생은 지역신문 덴버 포스트(The Denver Post) 은퇴 기자였는데 정치부 출신이어서 그런지 각 나라의 사정을 그런대로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학생은 8~10명 정도로 유럽, 아프리카, 남미, 동아시아와 러시아 등 전 세계 사람이 모인 것 같았다. 어느 날 자기 나라 언어를 소개하는 과제를 주고, 수업 날을 지정하여 해당 학생에게 30분 정도 발표를 시켰다. 내 차례가 되었다. “영어를 만든 저자가 누구신지 아십니까?” 존(John)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은 모른다는 제스처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버헤드 프로젝터(Overhead Projector) 위에 준비된 투명지를 올려놓고 한글을 설명하기 시작했다(당시 빔프로젝터가 아직 상품화되지 않았다.) 한국어는 500여 년 전 세종임금이 발음기관을 본떠서 만들었다. 또한 한글 모음과 자음이 결합하여 문자가 이뤄지는 원리와 어떻게 발음이 되는지를 영어식 발음기호를 가지고 보여줬다. 우리 글자는 자체에 이미 발음기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어휘를 보더라도 금방 발음할 수 있다고 했더니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 예를 가지고 실습을 시켰더니 발음하기가 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세종은 자신이 만든 문자의 원리를 책으로 편찬했고 서문을 직접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마다 이것을 쉽게 익혀 편히 사용하고자 할 따름이다’. 현재 미국에 있는 나는 영어에 서툴러 어리석은 백성임을 실감하고 있다. 이런 백성의 심정을 깊이 공감하여 글자를 만든 세종임금에 대한 고마움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규정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발표를 마쳤다. 다들 어떤 한 인간이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문자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 참 경이롭다고 입 모았다. 존 선생은 한국인은 ‘멋진 집’을 가지고 있어 부럽다며 앞으로 한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싶다고 하면서 수업을 마무리했다.

하이데거는 언어의 집에 인간이 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인간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즘 언어가 너무 살벌해지고 있다. 우리가, 정치가들이 마치 주인인 것처럼 반지성적인 무서운 언어들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 세대가 우리 ‘존재의 집’을 이렇게 훼손해 놓으면 다음 세대들은 어디서 살아야 할까? 일제 강점기에 목숨 바쳐 한글을 지키려 했던 선열의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맑고 깨끗한 그리고 명확한 한글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한글은 사람이 살아야할 영원한 존재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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