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민 (한림대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최근 한국과 일본 사이에 발생한 무역 갈등은 일본의 특정 소재 수출규제로 시작됐다. 국민들은 이 소재가 어떤 물질인지 몰라도 소재 대부분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던 반도체 강국의 민낯에 충격을 받았다. 수출규제 품목은 △에칭 가스인 불화수소 △고분자인 불화 폴리이미드 △포토리지스트 3종이다. 반도체 산업을 모르는 일반인에게는 무척 낯선 제품이다. 일본이 수많은 수출품 중에 특정 품목만 꼭 집어 규제한 이유는 그만큼 반도체 산업에 중요한 소재라는 반증이다. 이 소재는 얼마나 중요한 걸까. 
 
반도체 성능은 미세공정으로 향상된다. 같은 면적의 실리콘 기판 위에 미세하게 회로를 그릴 경우 선폭이 줄어들어 전자의 이동이 빨라지기 때문에 처리 속도가 증가한다. 물론 제한된 공간에서 더 많은 회로를 넣을 수 있기 때문에 부피도 감소한다. 결국 반도체는 미세화가 핵심 기술이다. 현재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이 미세선폭을 그리는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졌다. 이런 공정에서 소재들이 어디에 사용될까. 커다란 필름으로 인쇄된 반도체 설계도는 빛과 렌즈를 이용해 실리콘 기판 위에 작게 비친다. 영화관에서 필름을 스크린에 확대하는 것과 반대로 설계도를 미세하고 작게 비추는 거다. 이때 특정 물질이 반도체 위에 도포되는데 이것이 바로 포토리지스트다. 이 소재는 빛에 의해 반응하고 반도체 설계도가 정밀하게 그려지는 감광액인 셈이다. 그리고 그려진 그림을 따라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야 하는데 사용되는 것이 불화수소산이다. 반도체는 정밀한 감광과 식각이 수없이 반복되며 회로가 만들어진다. 현재 우리 기업은 그 선폭을 이론적으로 가능한 한계에 도전하는 단계다. 일본의 포토리지스트와 불화수소 규제는 결국 개발을 늦춰 경쟁에서 뒤처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서둘러 소재 생산 시설을 갖추고 반도체 공정에 적용하면 해결될 것 같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반도체 공정에서 소재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설비 투자 비용과 장기간의 적응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업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왜 준비하지 않았던 걸까. 
 
대기업은 이미 품질이 증명된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수입하면 되는데 굳이 투자와 시간까지 인내하며 국산품으로 바꿀 이유가 없었던 거다. 이런 재료뿐만 아니라 반도체 설비에 필요한 핵심장비를 중심으로 국내 중소기업과의 동반 발전을 확대해 자립기반을 만드는 것보다 손쉽게 수입에 의존해 외적 성장하는 것을 택했다. 물론 모든 부품을 자급자족하는 것보다 글로벌 분업체계가 성장에 더 유리하다. 일본이 장비와 소재의 국산화를 수직계열화한 독자노선을 택해 경쟁력 약화로 반도체에서 패망한 교훈이 있다. 오늘날 일본이 반도체 부품 소재에 집중한 것도 이런 국제 분업체계에 편승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우리의 수입 의존도가 너무 높았다. 품질이라는 방패는 자연스럽게 산업 생태계를 기형화했고 커다란 위협을 스스로 키운 것이다. 그리고 부품 소재는 기초과학기술의 기반에서 나온다. 그동안 기초과학 분야가 소홀한 토양에서 열매를 맺기 어려웠다. 이러한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성장이라는 목표만을 가지고 온 우리는 많은 것을 무시하고 잊어버렸다. 
 
국민 한 사람으로서 어이없는 행동을 한 일본에 대항해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참여하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한편으로 분명 기회다. 늦었지만 뒤틀린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인식이 충분히 확산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기회도 위기를 넘겨야 찾아온다. 우리는 낙관론보다 비관적 현실주의자가 돼야 한다. 쉽게 바꾸고 해결할 수 있다는 성급함보다 냉정하고 비관적으로 우리 현실을 봐야 한다. 충분히 해낼 수 있다며 촛불의 정신을 비유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간혹 일본과 적정한 타협을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 무역전쟁은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의 정부와 대법원판결을 부정하고 매도하며 도발한 침략행위다. 물론 외교와 협상으로 풀어가야 하지만 주권침해는 허락할 수 없다. 국가의 자주권과 국제사회의 품위는 우리 스스로 지켜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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