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 7월 27일 아침, 프랑스의 국민공회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한 남성이 국민공회의 연단에 오르려고 하고 있다. 그러자 국민공회의 의원들은 일제히 “독재자는 내려가라!”라고 외친다. 연단을 오르던 남성은 산악파의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였다. 당시 공포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의원들이 산악파에 반기를 든 것이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그 후, 1792년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왕당파와 왕정 폐지를 요구하는 공화파의 싸움이 일어나게 됐다. 그 결과 공화파가 승리하고 국민공회가 조직됐다. 국민공회가 조직되자 공화파는 △에베르파 △산악파 △지롱드파 등으로 나뉘었다. 같은 해 12월 왕의 재판이 시작되고 산악파는 왕의 처형을 주장했다. 재판 결과에 따라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이에 반발한 유럽의 왕정국가가 프랑스에 맞서게 됐다. 프랑스 정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징집령을 발하자 지방을 중심으로 반정부 운동이 벌어졌다. 이에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 분자들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1793년 6월 산악파의 사주를 받은 파리 코뮌의 노동자들이 국민공회에 난입해 지롱드파 의원들을 반혁명 분자라며 끌어냈다. 그리고 4개월 뒤 그들을 처형했다. 그 후 로베스피에르는 1년 사이에 1만 7천 명을 처형했고, 3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지롱드파의 뒤를 이어 에베르파를 숙청했다. 그 후 자신을 견제하던 조르주도 부정부패 혐의로 처형하면서 그의 독재는 더욱 굳어졌다. 그 결과 극심했던 파리와 지방의 소요도 잠시 진정됐다.
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의 오른팔인 생쥐스트가 로베스피에르 반대파를 숙청하자는 내용의 연설문을 읽기 시작하자 에베르파였던 탈리앵이 이를 저지했다. 그리고 탈리앵이 독재 타도를 외치자 다른 의원들도 동의하며 함께 외쳤다. 로베스피에르가 발언권을 요청했지만 주위 의원들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날 밤, 시청에서 농성 중이던 로베스피에르 일파를 부르동과 바라스가 이끄는 위병이 습격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잡힌다. 그 다음날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자코뱅당의 일원들은 재판을 받았다. 그날 오후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됨으로써 프랑스 혁명이 끝났다. 알베르 소불은 <프랑스혁명사>에서 이에 대해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으로 인해 다시 부르주아에 의한 지배가 시작됐다’며 ‘오랜 기간 민중은 정치 무대로부터 배제됐고 사회민주주의라는 민중의 열망은 무산됐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