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혜린(국어국문학 석사 19)

옛날엔 하나였다. 그래서 요즘 부쩍 무엇이 없어져만 간다. 

우린 언제부터 주체였을까. 우리가 있어야만 발견되는 대상의 존재가치는 무엇일까. 옛날엔 모든 게 하나였다. 카시러의 원초적 통일성처럼 ‘바다가 울어요’하면 진짜 바다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에서 가장 완벽한 상은 원이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둥근 원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였다. 그들만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통일적 존재가 아닌 ‘나’가 되고 싶어 한다. ‘나’는 영적 믿음이 해체되는 순간 태어났다. 그 원죄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나’의 개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는 생각 이상으로 우리를 방황시킨다. 나는 내가 되고 있는가? 내가 될 수 있는가? 남의 존재 방식을 베끼는 것이 아닌. 우리는 자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존재 방식만을 꾸민다. 어느새 우리는 남이 되고 싶어 한다. 남처럼,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어 한다. 무엇이 바뀐 걸까. 과연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나? 이제 타인의 삶은 보편이다. 쏟아지는 정보들이 상식이 된 이 사회 속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

잘못된 존재 방식만을 상기시키는 사회 속 모두 휩쓸려 간다. 그리고 똑같아진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우리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타자를 발견한다. 잔물결 같은 경계 속에서 나를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때문에 남이라는 관념에 나를 투영시키고 만다. 하지만 똑같은 존재 방식을 추구하는 삶들은 흐르지 않고 쌓여만 간다. 그들은 어느 지점에 배치되고, 끊임없이 대치된다. 존재 방식을 승화할 개인들은 어디에나 있다. 끊임없이 지연되고 미끄러지는 차연(差延)적 성질은 남들처럼 살고 싶어 하는 개인들의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와 같은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시초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내 존재를 곱씹어 보면 된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우울마저 수치화된 현 시국. 생각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시의 존재에 매달린다. 개인은 수많은 존재 방식을 추구한다. 그리고 상실감을 느낀다. 하지만 절대 남을 따라 할 수도, 남이 따라 할 수도 없는 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존재 방식이 눈치채지 못한 기척을 지우고 사는 그것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바로 ‘리듬’이다. 나의 리듬은 견고히 내 안에 있다. 

리듬은 심장에서부터 왔다. 피가 순환하는 기관은 생각보다 태초적이기 때문에 쉽게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다. 리듬의 체화가 곧 글이다. 남들이 글을 퇴고해줬을 때, 납득하기 힘든 부분은 당연히 있다. 내 호흡의 글과 남들의 글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의 리듬과 그들의 리듬이 다른 박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들숨과 날숨을 관장하는 가슴의 두근거림이 진짜 ‘나’였다. 우리는 그 기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적이다. 심장이 뛴다고 하면 진짜 뛴다고 믿는다. 시는 알고 있다. 시인들의 리듬은 원초적 고동에 기초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 시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 글을 쓰는 우리는 각자의 리듬을 안고 살아간다. 판도라 속에 있었던 희망처럼 원죄는 리듬으로 읽히고 쓰인다. 이를 아는 것과 모른다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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