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거리는 군용트럭에 수십 명이 몸을 싣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트럭 위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의 아이들과 맨발로 뛰어나온 부녀자들. 서로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멀어져가는 트럭들을 바라만 본다. 일본군은 여성들을 성노예로 끌고 가 참혹한 만행들을 저지르고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총살한다. 세계대전이 종전을 맺자 1946년 5월 3일, 제2차 세계대전에 가담한 일본인 전범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승전국인 미국과 연합국의 판검사들이 하나둘씩 재판장에 모인다. 도쿄전범재판의 신호탄을 알린다.

일본이 1915년 조선을 무단으로 통치하기 시작한다. 약 24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일본은 패전하고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35년의 긴 어둠 속에서 빛을 되찾는다. 1948년 11월 4일 최종 선고가 내려지기 전까지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같이 공판이 열렸고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증인 419명과 진술서 779개, 증거문서 4,336개가 제출됐다. 무려 일주일간 선고 낭독이 이뤄졌고, 세계대전 당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정계 및 군부 관계자 7명에게는 교수형이, 16명에게는 종신형이 내려졌다. 교수형을 선고받은 7명은 한 달 후인 12월 23일 스가모 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이 재판에서 주요 전범자라 할 수 있는 일왕 미치노미야 히로히토는 기소되지 않았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였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히로히토를 전범 명단에서 제외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할 경우 일본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며 ‘천황은 일본인 통합의 상징이기에 기소하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 필요한 군대를 무기한 유지해야 할 것’이라며 재판을 일단락시켰다. 재판관들은 개인 의견서를 통해 ‘검사가 일왕을 기소하지 않은 사실’을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재판을 종결시킨 사령부는 판결 당시 형무소에 있던 17명의 A급 악질 전범을 모두 불기소 석방했다. 더불어 전범 기업과 737 생체 실험부대도 기소되지 않았다. A급 전범들은 대부분 정계로 복직했고 사형 선고를 받은 전범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있다. 도쿄 전범 재판 사건은 총 3가지 논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전쟁의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일왕이 기소되지 않았고, 세계대전 당시 A급 전범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부분이다. 게다가 한국의 피해는 제대로 조사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경자(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교수의 논문 <동경재판이 초래한 전후 일본사회 전쟁 책임의식 결여>에 ‘동경재판이 남긴 문제는 오늘날 동북아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커다란 근본적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식민지배에 대한 제국주의 범죄 비판과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설명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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