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한국이 한일 청구권협정을 일방적으로 위반하면서 국제조약을 깨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일본은 한일 청구권협정을 통해 일제 강제동원 문제가 해결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1965년에 한일 청구권 협정이 맺어졌으나 피해자들과 협의가 되지 않은 사안이었고, 여전히 제대로 된 배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무차별적 폭력의 현장, 강제동원

강제동원의 역사는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 조약에서 시작된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주권을 일본에 빼앗겼다. 그 후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됐고 일본은 국민징용령을 적용해 △보국대 △징용 △여자근로정신대 등으로 조선인을 동원했다. 또한 △육군 특별지원병제도 △징집제도 △학도지원병제도 등도 실시해 조선인을 직접 전투 인력으로 동원했다. 1943년에는 조선인 징병제가 공포되고 1944년 학도 근로령까지 공포돼 수많은 학생이 전쟁에 징집되거나 노동을 강요받았다. 

강제동원 피해자 가운데 한일 청구권 협정과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사람은 노무 동원 피해자들이다. 노무 동원은 일본이 제국주의 시기에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노무자들을 동원한 행위다. 조선인들은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등으로 동원돼 군수공장, 석탄 광산 등 다양한 곳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노무자들은 일본인들의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하고 낮은 임금을 받으며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했다. 

강제동원이 시작되고 당시 조선인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끌려갔다. 처음에는 군인과 군무원을 지원병으로 모집했으나 후에는 징병령으로 동원했다. 일본군 ‘위안부’와 여성근로정신대를 모집하기 위해 여성들을 속이기도 했다. 일제 피해자 인권 특별위원회 위원장 최봉태 변호사는 일제 강제동원을 “일본이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데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식민지 청년을 끌고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이재철 운영관리국장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강제로 끌려가서 희생됐고 돌아온 사람들도 상처를 많이 입었다”라며 “특히 일본 미쓰비시 회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임금을 지불하지도 않았고 강제적으로 노동을 시켰다”라고 전했다.     

한일 청구권협정에 강제동원 피해자는 없었다

일본은 한일 청구권협정 체결을 통해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가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한일 청구권협정이란 1965년에 맺어진 한일 조약의 부속협정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을 골자로 다루고 있다. 

한국은 1949년부터 대일배상요구조서를 작성해 배상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1년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체결한 대일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한국은 참여하지 못했다. 그해 말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한일 간 국교 정상화와 배상 문제 논의가 시작될 수 있었다. 마침내 1965년 6월 22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에 국교 수립을 목적으로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됐다. 기본조약의 부속으로 한일 청구권협정이 맺어졌으나,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협의가 된 사안이 아니었다. <한일청구권 협정> 제1조에서는 일본이 한국에게 10년 동안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를 제공해야 함을, 제2조에서는 두 국가와 그 국민의 재산과 권리, 이익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음을 밝히고 있다. 제2조에 따라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 총 5억 달러가 배상금으로 협의됐지만 대부분이 경부고속도로, 전기 및 통신 등 국가적 차원의 사업을 위해 쓰였고 강제징용 사망자(9,546명) 1인당 30만 원만 배상금으로 지급됐다. 개인에게 이뤄진 피해배상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아직도 배상받지 못한 강제동원 피해자들

여전히 한국과 일본은 강제동원을 두고 입장이 대립되고 있다. ‘한일회담회의록’에서 일본은 ‘한국의 피 동원자들은 일본국민으로서 징용된 것’이라 표현했고, 한일 청구권 체결 이후에는 한국이 요구하는 사죄와 배상의 목적을 삭제하기 위해 ‘경제 협력의 명목으로 배상금을 지불한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일본에서는 독립축하금 혹은 경제협력금으로 일컫고 한국은 배상금 또는 보상금이라 말하고 있다. 일본은 강제동원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2012년 5월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청구권협정과 관련해, 일제 강점 강제동원 자체는 불법이며 개인의 손해 배상 청구권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조약의 모든 과정에서 일본의 강압이 작용했고 한일 강제병합은 국가에 대한 강박에 의한 체결이기에 불성립 또는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다. 

여전히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2018년 10월 30일 강제동원 피해자 원고 4명이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을 상대로 승소했다. 첫 소송이 일어난 1997년 이후로 21년 만에 대법원이 피해자 1인당 1억 원씩 배상하라고 최종 판결한 것이었다. 일본은 그전까지 한일청구권 협정에 따라 강제동원 피해자 개인을 배상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 사이 원고 4명 중 3명은 사망했고 한 명만 살아 있는 상황이다. 대법원의 판결에도 신일본제철이 손해 배상을 하지 않자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이 신일본제철 한국 자산 압류 신청을 승인했다. 하지만 여전히 배상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많이 남아 있다.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배상을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일본이 제대로 배상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다. 위령제에 참석한 윤부근(서울시, 79) 씨는 “국가에서 하루빨리 배상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다”라며 국가적 차원의 배상이 중요함을 거듭해서 강조했다. 전영상(사상구, 79) 씨는 “일본이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배상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역사 문제를 제대로 알고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최봉태 변호사는 “피해자들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와야 진정한 해방을 맞이한 것”이라며 “이를 위해 국민들이 역사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전했다. 배상뿐만 아니라 일본에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장동표(역사교육) 교수는 “일본이 전쟁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독일처럼 일본도 전범 국가로서 제대로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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