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선(정치외교학 석사 17)

왜 정치하겠다는 청년들은 하나같이 양복 차림일까? 교복도 자율화가 이루어진 마당에 ‘양복의 교복화’ 현상이 눈에 자꾸 밟힌다. 두발 규제도 사라진 마당에 2대 8의 머리칼 분배는 국정 가르마라도 되는 것인가. 도덕 교과서적인 발성법은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연장자를 예우하고자 빼입었다는 궁색한 대답은 듣고 싶지가 않다. 청년 세대의 정치혐오를 생각할 때면, 나는 왜 정치 지망생들의 차림새부터 떠올리는 것일까?

정치가 영화와 닮았다면, 정치 지망생들도 ‘정치인’이라는 캐릭터를 해석한다. 문제는 그 해석이 양복에 갇혔다는 것이다. 빈약하고 획일적이며 낡은 내가 난다. 으레 정치인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지레짐작들이 모여 굳어진 일종의 업계 상식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눈여겨볼 점은 젊은 정치 지망생이 기존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오히려 강박적으로 선호한다는 점이다. 다 큰 어른에 대한 복장 지적이 양복이 상징하는 비릿한 청년 정치의 한 단면으로 드러났으면 한다.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가장 기분 나쁜 순간은 “시장은 유능하고 정치는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다. 그러나 현실을 직접 목도하고 있노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최소 인재풀에서 만큼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공시생이 시험공부를 할 때, 취준생이 사회 경험을 쌓을 때, 정치 지망생은 자신의 시간을 어디에 투자했을까? 행사에 기웃거려 가방을 들고, 술잔을 따르며 불콰한 사진 찍는 허드렛일 외에 특기할 것이 없다. 이른바 ‘존재 노동’도 노동이라면 노동이지만, 이력서의 공란처럼 헛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 일회용 존재 노동의 필수품이 양복이라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실제로 청년 정치 지망생은 동년배 취업 준비생보다 확연히 스펙과 역량이 뒤떨어진다. 사실 청년이라는 기회를 이용했으나 사실 그게 전부기 때문이다. 어리다고 하대 받을 이유가 없다면, 사실 젊어서 우대받을 이유도 없다. 젊음은 사회가 특별히 배려하는 하나의 상태일 뿐이지, 정치의 이유나 자격이 될 수 없다. 생물학적 청년이 꼭 청년의 사회 문제를 잘 푼다는 보장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귀속된 정체성이기보다는 자질과 능력이다. 무엇이든 업(業)이 되려면, 시각이 독특하거나, 컨텐츠가 새롭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남들 하는 것을 더 잘해야 한다. 정치도 그렇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청춘이면 아파야 한다로 둔갑하더니, 청년 정치가 필요하다니까 정치 청년들만 몰려온다. 청년성을 양복에 포장하는데 급급한 정치풍토의 범람에서, 나는 공부하는 청년 정치인을 보고 싶다. 기성 정치인은 학창 시절 사회 운동에 전념하느라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손 쳐도, 우리가 이끌어갈 새로운 시대의 정치인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 자기자본과 원천기술 없는 기업이 오래 버티지 못하듯이, 자기 분야가 없는 청년 정치인이 자라 정치 자영업자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청년을 위한 것과 청년에 의한 것은 다른 개념이다. 준비 부족이 기회 부족의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 세상이 청년 정치를 일회용으로 소비할지라도, 정치 지망생들은 배움을 멈춰선 안 된다. 그래서 한 정치학도가 다른 정치 지망생들에게 감히 고하고 싶다. 취준생들과 지신을 구별 짓기 전에, 최소한 취준생만큼은 공부하시라고. 적어도 알맹이 없는 정치의 시대는 우리 손으로 끝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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