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 교수

“지금 우리 사회는 정규직 노조와 자본이 연대해서 하청과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구조다. 1% 대 99%가 아니라 20%가 80%를, 또는 50%가 50%를 착취하는 사회다” 최근 화제가 된 책 <불평등의 세대>의 저자인 이철승 서강대 교수가 전한 말이다. 그는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지배 세력이 된 386세대도 거침없이 비판한다. 

난 이 교수에게 내심 박수를 쳤다. 기존 좌우 이분법 구도를 통쾌하게 깨버렸기 때문이다. 진보 언론에서 노조의 문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가? 보수 언론에서 노조 탄압을 비판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가? 아마 거의 없을 게다. 진보는 ‘친노조’, 보수는 ‘반노조’라는 이분법은 완강하다. 물론 정치권과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이 교수는 불평등의 문제를 본격 거론하면서 노조 비판에 나서는 동시에 그간 ‘계급론’에 종속된 ‘세대론’을 역설함으로써 기존 이분법 구도에 균열을 냈으니, 이 어찌 칭찬할 일이 아니랴.

이분법은 불가피할 때도 있고 필요할 때도 있지만, 현재 한국사회를 집어 삼킨 이분법은 그런 게 아니다. 온몸에 체화된 습관이요 신앙이다. ‘진영논리’라고도 부르는 이분법은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해득실 차원에서 세상을 보고 판단한다. 이런 이분법도 그 나름의 명분은 있다. 개별 사건을 그 사건 자체로만 보지 않고 진영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평가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들은 ‘대국적’, ‘종합적’, ‘총체적’, ‘장기적’, ‘미래지향적’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면서 강조하는 것은 반대 진영이 얼마나 어리석고 흉악한 집단인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진영 내부에서 아무리 옳은 지적을 하더라도 그것이 당장 반대 진영을 조금이라도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용납해선 안 될 ‘내부의 적’이 되고 만다.

그 선의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이 선의가 진영 내부의 오류 교정 가능성을 원천 차단함으로써 스스로 무너지는 길로 나아가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런 구도 하에선 자기 진영이 잘할 수 있는 길과 방법을 찾기보다는 반대 진영을 공격하는 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게 된다. 반대 진영 역시 같은 행태를 보임으로써 ‘적대적 공생관계’가 형성되는 가운데, 국가와 사회는 엉망이 되고 만다. 

이런 이분법 전쟁에서 이긴 진영의 ‘승자독식’ 체제는 한국 특유의 연고 네트워크와 결합하면서 전체 국민의 절반 이상을 ‘이분법 소용돌이’로 끌고 들어간다. 한국 사회의 최대 문제는 바로 이런 ‘밥그릇 전쟁’으로 인한 ‘분열 의식’에 있는 것이지, 그 어떤 진영이 승리하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어느 한 진영이 상대 진영을 완전히 압도해 버린다면 ‘분열의 사회적 비용’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겠지만, 그게 불가능한 이상 그 어떤 정치와 개혁도 분열 비용을 넘어서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고 만다. 이걸 직시하는 게 진정한 ‘애국’이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히도 이런 망국적인 이분법에 비교적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로 20대다. 고성장 시대의 세대들은 ‘민주화’만 고민해도 무방했지만, 고성장 시대의 종언과 함께 닥친 ‘일자리 전쟁’은 공정의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그걸 개인적 영역으로 끌어 내렸다. 그래서 20대는 진영을 초월한 공정을 중시한다. 이 공정에 대해 구조를 보지 못한 ‘미시적 공정’이라거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능력주의 공정’이라는 비판이 적잖이 나왔지만, 이거야 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누가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나는 20대가 이전 세대보다 더 대학 서열에 미쳐 있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해 왔지만, 그런 서열구조를 심화시켜 온 386세대를 비롯한 기성세대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20대의 공정 개념에 그 어떤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구조 개혁의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다. ‘밑에서 위로’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를 내포한 개념이다. 20대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수가 되리라는 희망을 키워가는 게 이 지긋지긋한 이분법 세상을 끝낼 수 있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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