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영

소설가

“소설 속에 부산 지명이 나오니 이해가 잘 되면서도 낯설어요.”

군가의 소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독서 모임에 있던 사람들 모두 지금, 현재 부산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왜 부산 지명이 나오는 소설이 어색하고 낯설었던 것일까. 

독자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킨 소설은 다름 아닌 내 소설 <밤의 행진>이었다. 예비 부부가 신혼집을 구하기 위해 부산의 여러 동네를 방문하면서 일어나는 일이 소설의 주요 핵심인데, 그중에는 예비 신부가 과거에 혼자 살기 위해 ‘원룸’을 구하는 장면도 있었다. 예컨대 이런 구절 말이다.

“부전동, 범일동, 문현동, 가야동…… 지도 위의 동그라미들은 점점 커져 갔다. 서면에 있는 임용 학원이 그나마 가까우면서도 집값이 싼 곳을 알아보아야 했다. 무료정보지와 생활 게시판을 챙겨보고 인터넷 부동산을 즐겨찾기 해 놓았다.”

부산 거주인이라면 초·중등 임용고시, 경찰·소방공무원, 9급 행정직 공무원 시험을 위한 학원들이 서면 일대에 가장 많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러니 20대 후반의 여주인공이 임용고시를 위해 서면 일대에 원룸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건 새로운 것도 낯설거나 이상한 상황도 아니다. 그럼에도 독서 모임의 독자들은 생활 속에서 지극히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상황들을 소설에서는 낯설게 보고 있었다. 

우리에겐 소설 속 주인공이 서면보다는 서울의 ‘노량진’이나 ‘신림동’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부산대 앞, 경성대 주변보다는 ‘홍대 입구’나 ‘명동’에서 친구를 만나는 장면이 더 익숙하기 때문은 아닐까. 구포역에서 고향 친구를 만나기보다는 ‘서울역’에서 극적 상봉을 해야 무언가 더 소설적이라 느껴지게 되고 말이다. 나의 이런 생각을 이야기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수도권 작가들이 어떤 특권이나 우월의식을 가지고 수도권 지명을 소설 안에 써 넣는 건 아닐 거다. 그들에겐 그게 일상일 테니까. 문제는 비수도권 지명을 소설 안에 쓰려고 하면, 그게 어떤 ‘장치’로서 작용해야 한다는 의식이 깔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해운대면 왜 굳이 해운대여야 하는지, 보수동이면 왜 보수동이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있는 근거가 제시되어야 할 것 같은. 부산은 내게 일상인데, 일상으로서의 부산을 쓰려고 하면 왠지 몸이 굳는다. 나도 모르게 검열이 작동하는 거다. 뭐랄까, 우리 몸에 무의식적으로 지역의 위계 설정이 되어있는 듯하다.”

독자들이 느낀 이상하고 낯선 감각은 사실, 나에게도 적용된다. 위의 인용문은 문학 잡지 <비릿>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한 말이었다. 독자로서뿐 아니라 작가로서도 부산의 지명들을 소설 속에 쓰려고 하면, 부산만이 가지고 있다는 ‘고유성’, ‘차별성’ 등을 내세워서 소설의 내적 논리를 만들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고유성과 차별성을 제외하고도 부산은 일상으로서의 매력과 활력도 가지고 있는 도시이지 않을까 싶다. 굳이 부산하면 ‘해운대’와 ‘자갈치아지매’, ‘부산국제영화제’,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센텀시티의 한 ‘백화점’을 언급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부산다운 것’이란 말에 내포된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는) 환상과 강박에 사로잡혀서 지금-이곳을 보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고민은 좀 더 다양한 모습의 부산이 문학 작품 속에 등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어졌다. 치솟는 집값에 힘들어하는 30대, 좁아지는 취업문에 좌절하는 대학생과 첫사랑에 아파하는 2019년 현재 ‘부산 사투리’를 쓰는 주인공들이 나오는 문학작품으로 말이다. ‘장치’로서의 장소가 아니라 ‘생활공간’으로써의 부산을 그려내고 싶다, 라는 말에는 이러한 나의 생각과 고민이 담겨 있었다. 물론 이 고민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많은 작가들이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해결되거나 해소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고민과 의심, 다짐들이 모여서 부산을 형상화하는 다양한 작품들이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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