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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민주화의 물결 조형물에 새겨지다
  • 배현정 편집국장, 지예인 수습기자
  • 승인 2019.05.11 17:10
  • 호수 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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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관 필로티 광장에 故 고현철 교수 추모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건설관 앞에 있는 부마민주항쟁발원지표지석이다
새벽벌도서관 앞에는 부마 민주 항쟁탑이 있다

우리 학교에는 대학 민주화를 진전시킨 사건들이 있었다. 부마민주항쟁을 촉발시킨 우리 학교 학생들의 교내 시위와 故 고현철 교수의 투신 사망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부대신문>이 두 사건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조명함으로써, 그들이 민주화에 힘써온 역사를 되새겨본다.

故  고현철 교수, 민주화의 불꽃이 되다

 2015년 8월, 우리 학교 故 고현철 교수가 총장 직선제 폐지를 막고, 대학의 자율화를 요구하기 위해서 몸을 던졌다. 이에 故 고현철 교수는 학문의 자유가 보장돼야 하는 대학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투신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한 해가 지난 뒤 우리 학교 고현철 교수 추모사업회가 故 고현철 교수를 추모하기 위해 인문관 필로티 광장에 조형물을 설치했다. 높이가 2m 정도의 청동 작품이며, 불꽃 모양의 새싹을 상징화했다. 故 고현철 교수의 민주화를 향한 불꽃 같은 마음이 새로 태어나는 새싹과 같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부마민주항쟁’의 시발점을 기리며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유신독재에 맞서 우리 학교를 시작으로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항쟁이다. 1972년에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 체제를 선포했다. 긴급조치권을 발동하며 더욱 국민들을 억압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청년들에게 좌절감을 가져다줬지만, 일부 우리 학교 학생들은 문창대 등지에서 모임을 가지는 등 비밀리에 활동을 이어갔다. 1979년 10월 15일, 우리 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진걸과 남성철 학생은 도서관과 본관 등 학내를 돌며 자신들이 제작한 ‘민주선언문’을 뿌렸다. 이날의 시위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지만, 다음날 시위가 전개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10월 16일, 시위대는 ‘독재 타도’를 외쳤고, 삽시간에 7천여 명으로 규모가 늘어났다. 이는 부산시 전체와 마산시로 시위를 확산시켰다. 그리고 10.26 사건의 발발에도 영향을 미치며, 유신 체제의 붕괴를 끌어냈다.
 

부마민주항쟁은 우리 학교 학생들의 교내 시위로 시작됐다. 시위의 출발점은 바로 건설관 앞이었다. 그래서 부마민주항쟁의 발원지를 알리기 위해 1999년 ‘민주항쟁기념사업회’와 우리 학교 민주동문회가 건설관 앞에 부마민주항쟁발원지표지석을 세웠다. 부마민주항쟁발원지표지석은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사각형 모형의 아랫돌 위에, 가로로 긴 타원형의 윗돌을 얹은 모양을 갖추고 있다. 윗돌에는 부마항쟁 당시의 구호였던 ‘유신철폐 독재타도’와 ‘민주주의 신새벽 여기서 시작하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아랫돌에는 신영복의 글귀가 적혀 있다. 부마민주항쟁발원지표지석은 우리 학교가 부마 항쟁의 발원지이자 여전히 부마 항쟁을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념물이다. 
   

새벽벌도서관 앞에 있는 ‘ 부마 민주 항쟁탑’은 1988년에 부마민주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사각형 모형의 석조 받침대 위에, 타오르는 횃불의 형상을 한 청동 조형물이다. 부마 민중 항쟁탑의 건립 시초는 우리 학교 총학생회가 1985년에 개최한 ‘대동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동제의 수익금과 이후 조성된 기금으로 새벽벌 뜰에 1988년 건립됐다. 이는 부마 민중 항쟁을 기념하는 최초의 기념물로서 의미가 있다. 탑에 새겨진 노랫말에서 당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사회적 참여 등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킨다.

 

배현정 편집국장, 지예인 수습기자  press@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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