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1948년 5월 31일 월요일, 국회의사당에서 당시 국회 임시의장 이승만이 이처럼 기도문을 올리는 것으로 제헌국회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렸다. 제헌국회의 출발은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시작한다.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의에 따라 열린 위원회가 1947년 8월 12일 완전히 결렬되며, 한국에 통합정부를 수립한다는 목적이 무산됐다. 한국 문제가 표류하게 되자 미국은 9월 17일 국제연합 총회 둘쨋 날에 마셜 국무장관을 통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정식의제로 상정했다. 그리고 같은 달 21일에 총회 운영위원회가 총회 의제에 포함할 것을 통과시켰다. 이후 총회 제1차 위원회에 한국 문제가 정식으로 심의됐다. 이 위원회에서 미국 측은 1948년 3월 31일에 남북한 총선거를 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소련 측은 1948년 초까지 먼저 한국에서의 외국군 동시 철수를 주장해 대립했다. 결국 11월 14일 총회 본회의에서 미국 측 안이 찬성 43명, 반대 0명이라는 압도적 결과로 채택됐다. 

한국 최초의 선거로 기록된 제헌국회 총선거는 투표율이 선거인 총수의 95.5%로 역대 선거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5.10 총선거를 통해 △무소속 85명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의 55명 △한국민주당 29명 △대동청년당 12명 등 총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이 선출됐다. 5.10 총선거는 21세 이상 국민에게 동등한 투표권이 보장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보통선거로 평가된다. 김주환(경기대 정치학) 교수는 논문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논쟁과 개편방향 : 5·10 총선거와 대한민국 정통성에 대한 서술을 중심으로>에서 ‘5·10 총선거를 통해 주권은 국민에 있다는 민주주의의 학습은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제도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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