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강의실에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질문”이다. 애초에 이런 단어가 강의실에 존재했었는지 의문일 정도로 수업 시간에 질문을 받은 적이 없다. 마지못해서 질문을 해 보라고 하면 쭈뼛쭈뼛 손을 드는 경우가 가끔 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이 강의에 전적으로 만족해서 아무런 이의가 없기 때문에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질문 없는 강의가 성립하려면, 강의 내용이 아무런 이의가 없어서 그냥 받아 적기만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학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학문에도 이견이 있고 다양한 해석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할수록 강의실에서 ‘질문’이 없다는 것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초등학교부터 ‘의문을 갖고 질문하기’보다 ‘받아쓰기’에 숙달된 학생들은 의문을 갖는다는 것, 질문한다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는 것이 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더욱 용기를 내기 어렵다.

짧게 경험했던 미국의 대학 수업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교수들의 강의 내용이 아니라 수업 시간에 수많은 학생들의 질문들이었다. 교수에게 별 걸 다 물어 보는데 내용은 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그런 질문을 한국 대학에서 했다면, 핀잔을 들었을지도 모를 정도의 기초적인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는 싫은 표정 하나 없이, 일일이 답변을 해 주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요컨대 핵심은 질문의 내용이 아니라 바로 질문한다는데 있다. 

질문을 통해서 학생들 역시 수업 속의 행위자로서 수업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동양에서 2000여년 동안 첫 번째 고전으로 손꼽혀 온 <논어> 역시 공자들과 그의 제자들 간에 서로 질문하고 답변한 내용을 묶는 선집이다. 지구 반대편의 플라톤이 엮은 <대화편> 역시 내용은 다르지만, 질문을 통해서 학문을 연구하고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생은 오로지 자신의 말만 하고, 제자들은 그저 듣기만하는 수업 방식은 세계 어디에서나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문(學問)이란 배우고 질문하는 것이다. 결국 아무런 반성적 성찰이 없는 학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죽은 지식일 따름이다. 대학의 위기는 입시 학원과 별반 다를 바 없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학생이 대학 강의에서 학문을 하는 보람을 느끼고, 각자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할 때, 대학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사회에 올바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질문을 찾고 능동적으로 수업에 참여해야만 한다. 교수 역시 스스로 학생들의 질문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답하면서 이를 부드럽게 유도하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학 당국도 교수와 학생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대규모 교양 강의를 지양하고 소규모 강의가 확대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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