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응천 문사철 대표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한미관계마저 삐걱거리는 모양새다. 미국 정부와 의회에서 한국이 중국 쪽으로 기우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목소리마저 나온다. 분명 전통적인 한미관계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이라는 고래 사이에서 등 터질 일을 걱정해야 하는 새우 신세는 한국사에서 낯선 상황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평행이론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지금의 한국과 가장 비슷한 처지로 기억되는 것이 광해군과 인조 시절의 조선이다. 광해군은 17세기와 21세기의 이 같은 평행이론에 힘입어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왕 가운데 한 명으로 떠올랐다. 그가 기존 강대국인 명(明)과 신흥 강대국인 후금(後金) 사이에서 절묘한 중립외교를 추진했다는 이유에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608년 왕위에 올랐다. 그 무렵부터 만주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여진족은 누르하치의 지도 아래 1616년 그 옛날 북중국을 호령하던 금(金) 왕조를 재건했다. 이를 후금이라 부른다. 명은 후금이 더 크기 전에 싹을 없애 버릴 요량으로 정벌에 나서면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아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난 조선은 이 같은 요청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광해군은 고려 시대의 역사를 떠올렸다. 그때 금은 고려의 전통적 우방인 송(宋)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사실상 중국 대륙의 최강자가 되었다. 여진족은 본래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모시던 북방의 ‘오랑캐’였다. 그런 금이 고려에 자신을 천자의 나라로 받들라는 요구를 해 왔으니 고려로서는 분통이 터질 만도 할 일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정세의 변동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했다. 광해군은 바로 이 같은 고려의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1618년 그는 명에 원군을 보내면서 대장인 강홍립에게 형세를 살펴 대처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강홍립은 명군이 전멸한 부차전투 직후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다. 명의 요청에는 파병으로 응하면서도 후금과의 관계는 파탄내지 않는 수였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 가운데 특히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던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노선에 분개했다. 그들은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한 뒤 후금을 오랑캐로 배척하고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했다. 이러한 조선의 태도 변화는 후금의 침략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1627년 후금은 조선 정벌을 단행하면서 맨 앞에 강홍립을 세웠다. 정묘호란으로 알려진 이 전쟁의 결과는 조선이 후금을 형의 나라로 모시는 화의였다. 
 

1636년 후금의 제2대 칸 홍타이지(태종)는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인조에게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강요했다. 인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다시 한 번 군사를 일으킨 것이 병자호란이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50일 가까이 항전하다 성을 나와 태종 앞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그는 목숨과 왕위를 보전했지만 조선 백성은 20만 명이 넘게 포로로 끌려가는 참혹한 운명을 맞닥뜨려야 했다.
 

1894년 조선은 청과 신흥 강국 일본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새우 신세가 되었다. 그때는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져, 조선은 결국 그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120여 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는 다시 한 번 미중 패권 대결의 한가운데로 몰려 들어가고 있다. 이 평행이론에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 패권 대결이 우리 땅에서 전쟁으로 이어진다면, 그 결과는 우리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힌다는 것이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가 취할 역사적 모범 사례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조가 자초했던 종류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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