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희 

(예술문화영상학 박사 17)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유해진이 출연한 TV 광고에 등장하는 이 문구는 온라인에서 게으름을 강조하고 싶을 때 유희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학교, 회사, 가정생활 등 여러 가지로 공사다망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때때로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최근 워싱턴포스트(WP)에서는 우리의 소망이 실현된 버전인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직업’을 소개했다. 스웨덴 교통부와 공공예술부에서 2026년 완공되는 구텐베르크 코슈배겐역 직원으로 채용 예정인 이 직업은 출·퇴근 시 사무실 스위치를 켜고, 끄는 일 외에 어떤 업무도 하지 않는다. 월급은 약 260만 원 정도이며 심지어 휴가와 정년도 보장된다. 

다소 황당해 보이는 이 일자리는 사실 스웨덴 AI 공학 부설 실험실에서 주관한 ‘영원한 고용’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이다. 이는 대규모 자동화된 기계들과 인공지능로봇이 인간의 직업을 대체하는 근 미래에 볼 수 있는 풍경이며, 한편으로는 생산성 측면에서 쓸모없어질 인간의 노동과 현대성의 본질에 대해 철학적 의문을 제기하는 ‘잉여 인간 실험’이다. 잉여는 말 그대로 ‘남아도는 것’으로, 거칠게 말하면 잉여인간은 가치 없는 인간이다. 그렇다면 근 미래, 인류에게 다가올 위협적인 상황에 맞닥트릴 잉여인간은 누구일까?2015년 UN은 인류의 평균수명을 고려해 생애주기를 0~17세는 미성년자, 18~65세는 청년, 66~79세는 중년, 80~99세는 노년으로 새롭게 제안했다. 이는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100세 삶이 보편화되었음을 뜻한다. 이 새로운 생애주기의 적절한 예시를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UN이 새롭게 제정한 생애주기가 무색할 만큼,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현재 우리 주위 많은 노인들은 소외되고 있다. 주말에 영상통화로 은행 업무도 가능한 시대에, 그들은 디지털기기를 사용할 줄 몰라 여러 곳에서 외면 받는다. 요즘 영화관, 음식점, 기차역, 고속버스역 등에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무인화시스템 앞에서 노인들은 예매나 주문을 못해 해당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고 주변부로 밀려난다. 노인은 이제 더 이상 현명함이나 지혜의 상징이 아닌 것이다.

‘어린아이 너무 나무라지 마라, 네가 지나온 길이다. 노인 너무 무시하지 마라, 네가 걸어갈 길이다’. 모 방송프로그램에서 배우 박중훈씨가 ‘어머니가 자주 하시는 말씀’이라며 전해준 말이다. 길은 누구에게나 다양한 형태로 펼쳐진다. 언젠가는 내가 걸을 수도 있는 길을 한번쯤 떠올려본다면, 우리는 세대 간의 간격을 좁혀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본격적으로 도래할 AI 시대에 우리 또한 새로운 젊은 세대에게 잉여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지니는 가치와 의미는 곧 펼쳐질 내 미래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깊이와 넓이가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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