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영 소설가

얼마 전, 한 모임에 다녀왔다. 한 권의 책을 한 달 동안 읽고 정해진 날짜에 모여서 책에 대한 다양한 소감과 감상을 이야기하는 독서모임이다. 20대 초반부터 30대 후반까지, △대학생 △취업준비생 △직장인 △자영업자 등 나이와 성별, 직업이 제각각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책을 매개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어 책의 죽음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시대에 평일 저녁 시간을 할애해서 모인 사람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모임이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독서가 취미라고 말하는 것이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은 시대에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모임이 많아지면 작가들에게도 참 좋겠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곱씹으며 참가자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왜 책을 읽지 않을까요?”
 

다소 뻔하고 흔한 질문이라 생각할 지라도 참가자들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책보다 재미있는 것, 그러니까 유튜브나 △영화 △웹툰 △게임처럼 즉물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이 많아서라는 대답이 제일 먼저 나왔다. 다음으로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라는 대답이 뒤따랐다. 중고등학생 때는 공부하느라, 대학생 때는 취업을 준비하느라, 직장인이 된 이후에는 일하느라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보충설명도 이어졌다. 첫 번째 대답에도, 두 번째 대답에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재미보다는 학습의 도구로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세 번째 대답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아’ 하고 짧은 탄성을 질렀다. 첫 번째, 두 번째 대답을 포괄할 수 있는, 우리가 책을 멀리 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주변에 어린 아이를 둔 부모들은 하나같이 아이가 책을 좋아하고 잘 읽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바람을 이루고자 한글조차 읽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작게는 몇십만원부터 크게는 몇백만원이나 하는 전집들을 사서 책장 가득 꽂아두고 있는 것일 테다. 아이가 하루 동안 읽은 책을 ‘책트리’ 모양으로 만들어 SNS에 인증샷을 올리고, 지인들에게 이야기하는 부모의 마음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가 옆집 아이보다 책을 더 읽어서 흐뭇해하는 부모의 속마음은 정말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길 바라는 데만 머무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책을 통해 지식을 축적해서 조금 더 나은 학업성적을 얻길 바라는 마음이 은연 중에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책놀이’, ‘책육아’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하고 있지만 그 밑에 숨겨진 부모의 욕망은 아이가 책에 친숙해져서 더 잘 학습하고 더 많이 지식을 축적하길 바라서가 아닐까? 중고등학교 때의 책읽기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숙제처럼 여겨지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책이 주는 재미와 즐거움은 학습과 교훈, 의무라는 무거운 목적 아래 짓눌려버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제를 돌리고자 참가자들에게 다시 물었다. 

“책을 왜 읽어요?” 

“재미있어서요”
 

참가자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같은 질문을 내게도 한다면 마찬가지 대답을 할 것이다. 책읽기가 주는 여러 효용이 있지만 그 모든 것 위에 올라설 수 있는 대답은 정확히 하나이기 때문이다. 재미있어서. 그러니 책이 가진 여러 의미와 가치를 잠시 내려놓고 책 본연의 재미에 집중해보면 어떨까 한다. 책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잠시 덜어놓고 보면, 정말이지 책읽기보다 재미있는 놀이도 없을 것이다. 
 

요한 호이징하는 그의 책 <호모 루덴스>에서 이해득실로부터 무관심한 놀이의 정신이 문명을 이룩한 근본 토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무목적’을 그 자체의 목적으로 삼는 ‘호모 루덴스’의 태도야말로 꽤 근사한 독서법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싶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