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인 기자
결핍은 예술을 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 길바닥에서 시작한 활동이 존경받는 예술이 되기도 하고, 인디 밴드의 음악만 봐도 초창기 어설프게 만든 노래가 가장 좋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헝그리 정신’이 깃들어 있어서 그렇다고 느꼈다. 창작 공간 역시 다를 것 없었다. ‘창작 공간이라는 게 굳이 왜 필요해? 내가 창작하는 곳이 작업실이지’가 취재를 가기 전까지 필자의 생각이었다.
 
“출퇴근을 할 일이 없으니까, 매일 밤을 새우게 돼요. 그래서 30살쯤엔 대상포진에 걸렸어요”. 이상 속에 빠져있던 내게 취재원의 말은 충격이었다. 취재원은 내가 꿈꾸던 모습 그 자체였다. 어떠한 구속 없이, 자유롭게 예술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에게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해진 작업실이 없다는 것은 내 이상처럼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공간’은 예술인들에게 큰 문제였다. 단순히 일할 공간이 있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창작공간의 여부에 따라 그들의 삶이 통째로 흔들렸다. 공간은 일과 삶의 경계를 만들었다. 창작 공간이 없는 예술인에겐 일과 삶의 경계가 없었다. 집이 직장이 되는 경우 그들의 삶은 끝나지 않는 일의 연속이 됐다. 생활 패턴도 쉽게 붕괴됐다. 이는 창작물의 퀄리티 저하로 이어졌다. 또한 많은 예술인은 공간의 부재로 인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딘가에 소속돼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 소속될 공간이 없는 예술인들은 떠도는 마음을 붙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부산의 문화 시설 인프라는 전국 최하위 수준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8 문화기반시설총람>에 따르면 부산의 문화시설 인프라는 17개 시·도 중 17위다. 문화시설 인프라도 이 같은 마당에 예술인을 위한 창작 공간이 충분할리 만무하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이 예술에 대한 시와 시민들의 인식에서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노동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결핍을 예술의 자양분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까지 온 것이다. 필자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가. 결핍은 예술가한텐 낭만이야, 이상적인 말을 하는 동안 부산의 예술인들은 카페를 연연하고, 끝나지 않는 일을 떠안은 채 집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일상을 보냈다. 그렇게 사라졌을 아이디어가 몇 천 개일까. 부산시의 공간에 대한 미비한 지원은 갈 곳 없는 아이디어를 붙잡아주기는커녕, 예술가들을 갈 곳 없는 신세로 만들고 있었다. 
 
이쯤에서 1학년의 필자가 패기 넘치게 했던 말을 떠올려 본다. “영화든 뭐든 우리의 모든 활동이 예술입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예술이기도 하지만, 예술의 현장은 모두 노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결핍은 예술을 만드는 게 아니라 예술을 말라 죽게 한다. 창작 공간의 부족은 창작의 부재를 낳을 것이다. 나는 이상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이상이 그들의 일상에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 부산시는 지역 예술인을 위한 현실적인 대책을 위해 공간을 마련하고 문화시설 인프라가 형성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시민들의 예술인과 공간에 대한 인식 역시 개선돼야 한다. 지역 예술인을 위한 공감과 공간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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