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민 수만 명이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진주 읍내에 모여 서리들의 가옥 수십 호를 불사르고 부셔서 그 움직임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임술년에 일어난 진주 농민 항쟁을 묘사한 책 ‘임술록’의 한 구절이다.                                                     

19세기 조선은 세도 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특히 진주민은 경상 우병사 백낙신, 진주 목사 홍병원이 부정부패를 자행하면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을 중심으로 폭정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유계춘과 이귀재 등을 중심으로 비밀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고 민중의 열기는 달아올랐다.

임술년 음력 2월 18일(양력 3월 14일) 유계춘, 이귀재의 주도로 군중들은 읍내를 공격했다. 본격적으로 봉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초군’이라고 부르며 머리에 흰 두건을 두르고 관아를 점령했다.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병사들이 출동했지만 소용없었다. 농민들은 오히려 병사들을 둘러싸고 그동안의 핍박에 대한 죄를 물었다. 또한 진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탐관오리에게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던 인물들의 집을 공격했다. 결국 그들은 진주성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관리들은 부정부패를 없앨 것을 약속하며 협상을 벌였지만 농민들의 항쟁은 멈추지 않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비상대책 회의를 열어 백낙신, 홍병원 등을 처벌했다. 또한 관리를 파견해 민란의 원인을 파악하도록 했다. 이후 진주 농민 항쟁의 직접적 원인인 삼정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논의하는 기관인 삼정이정청도 설치됐다. 

진주 농민 항쟁은 이후 이어진 많은 농민 봉기의 시발점이 됐다. 그들의 항쟁 소식이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 전국적으로 봉기가 확대된 것이다. 그러나 후에 진주민란의 주동자인 유계춘, 이귀재 등이 처형되고 농민에게 보복성 형벌이 내려져 한계점이 있다. 김동철(사학) 교수는 “삼정의 개선을 위해 설치된 삼정이정청이 얼마 안 가 유명무실화됐다”라며 “진주 농민 항쟁은 토지 문제, 조세 문제와 같은 당시의 기본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진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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