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응천 문사철 대표

남북한의 국호는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국호가 민족적 칭호와 정체(政體) 및 국체(國體)의 칭호로 구성된다고 할 때 남북한의 국호는 그 두 부분에서 모두 공통점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의 영향을 받아 분단된 나라는 남북한 말고도 중국, 베트남, 독일 등이 있다. 이 같은 분단국가 중 남북한의 ‘대한’과 ‘조선’처럼 국호의 민족적 칭호마저 달리한 나라는 없다. 중화민국(타이완)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中華)’를,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은 ‘베트남(Viet Nam)’을,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독일(Deutschland)’을 공유했다. 남북한은 고작 영어 칭호에서만 Korea를 공유하고 있는데 다른 분단국가들도 물론 China, Viet Nam, Germany라는 영어 칭호를 공유했다. 

이처럼 닮은 데가 없는 남북한 국호는 남북한이 평화와 통일을 향한 상호 교류를 할 때 적잖은 불편으로 다가온다. 남은 북을 북한, 북은 남을 남조선이라 부른다. 양측이 만날 때는 서로를 남측, 북측 하고 부른다. 남북한의 단일기도 남측은 한반도기, 북측은 조선반도기라고 부르고 있다. 한자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에서는 남을 한국(韓國), 북을 조선(朝鮮)이라고 표기한다. 역사를 모르는 그 나라 사람들은 남북한이 원래 한 나라였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수천 년의 역사를 공유하고 통일을 갈망한다는 남북한이 어쩌다가 이렇게 완전히 다른 국호를 갖고 갈라졌을까?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의 통합사령부를 지향하며 수립된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대한은 1897년 고종이 근대적 국민국가를 지향하며 선포한 제국의 이름이었다. 그는 이전에 사용하던 조선이라는 칭호가 중국에 사대하던 봉건왕조의 국명이라는 이유로 옛날의 삼한을 한데 아우른 나라라는 뜻의 대한을 작명했다. 임시정부를 세운 독립지사들은 대한에 ‘민주공화국’이라는 뜻을 가진 민국을 결합시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창조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통합을 유지하지 못하고 4년 만에 분열되었다. 1923년 외교를 통해 독립을 달성하느냐 일제에 대한 선명한 투쟁을 통해 달성하느냐 하는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접점을 찾지 못하고 좌익 계열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임시정부에서 떨어져 나갔다. 좌익 계열은 임시정부로부터 멀어져 가고 대한이라는 칭호도 외면했다. 그들이 택한 칭호는 수천 년 간 민족의 범칭(汎稱)으로 쓰이고 일반 민중에게 친숙한 조선이었다. 이후 독립운동이 좌우로 나뉘어 전개되면서 우익은 대한이나 한, 좌익은 조선을 단체 이름이나 예비 국호로 사용했다.

1945년 8월 15일 불현 듯 찾아온 해방과 함께 고대하던 자주독립국가가 눈앞에 다가왔다. 좌우로 나뉘어 일제와 싸우던 독립운동 진영은 힘을 합쳐 통일정부 수립에 노력하자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외무장관 회담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한국인의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그 임시정부는 최장 5년간 강대국의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조건까지 달았다. 우익은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좌익은 임시정부 수립에 찬성하면서 좌우 양 진영은 다시 갈라져 싸웠다. 그때 우익은 대한을, 좌익은 조선을 국호로 내세우며 끝장 대결을 벌였다. 통일독립국가를 세운다는 대의 아래 논의를 거쳐 하나로 통합될 줄 알았던 대한과 조선이 다시금 양보 없이 대립하게 된 것이다. 당시 세간에서도 이러한 대립을 가리켜 ‘좌조선 우대한’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결국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반도의 분단은 확정되고 말았다. 독립운동기와 해방 공간에 걸쳐 반복된 좌조선 우대한의 평행이론은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에 반드시 풀어야 할 저주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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