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은 최근 몇 년 동안 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2017년에는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서도 기념비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최고법원이 동성혼을 금지한 현행 민법을 위헌으로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 진보는 1년 반 만에 뒤집혔다. 폭압과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2018년 국민투표에서 국민들이 압도적인 차이로 동성혼을 다시 불법화해야 하며, 심지어 성 평등 교육도 중단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국민투표를 비롯한 직접민주주의가 진정 민의를 반영한 방식이고, 최고법원의 결정은 민의를 무시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을 직접 뽑고, 그들은 행정과 입법을 통해 국정을 운영한다.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의 인적 구성은 그렇게 만들어진 법률로, 국민이 위임한 권한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 또한 민의의 발현이다.

하지만 뒷맛이 깔끔치는 않다. 동성혼은 고사하고, 한국에서 동성애 찬반 여부를 국민투표에 붙인다면 아마 반대가 크게 승리할 것이다. 이토록 뚜렷한 민의를 거스르고 대통령이나 사법부 엘리트가 나서 동성애자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정말 진보적인 움직임일까?인권, 자유, 평등, 수없이 많은 측면에서, 사실 그렇다. 하지만 민의를 무시하는 것이 해답이 될 수도 없다. 주권은 그 민의에 있고, 대통령조차 그에 기반을 두지 않고서는 정당성을 잃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오는 열쇠가 숙의다. 단순히 머릿수만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를 함께 숙고하고 의논하는 것이다. 그 기반에는 물론 합리성과 과학적 근거가 있어야 하며, 전문가나 조직 관료의 존재가 이 부분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 정부도 시도했던 적이 있다. 신고리원자력발전소 5·6호기의 건설 재개·중단 여부를 두고 공론화위원회를 구성, 그 숙의의 결과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원전과 에너지 정책이라는 고도로 전문적인 분야를 일반 시민의 숙의에 맡기는 것이 적절하냐 하는 논란이 일었고, 이 ‘실험’은 일회성으로 끝났다. 하지만 인상 깊었던 점이 있는데, 원전 건설에 대한 시비를 떠나, 예상과는 달리 숙의가 진행될수록 건설 재개로 힘이 쏠리는 등 적어도 포퓰리즘과는 거리가 먼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며 국민과의 소통을 늘릴 것을 공언했으나 사실 잘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초반 보여줬던 파격적인 소통 행보는 거의 사라졌다. 그나마 남은 청와대 청원은 정념과 혐오가 뒤섞인 난장판이 되어버렸으며, 그에 대한 답변도 그리 성실해 보이진 않는다. 국정 철학을 설득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숙의의 과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여론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쩌면 여론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일 수도 있다. 논의가 논란을 낳고 지지율을 떨어뜨릴 것을 우려할는지도 모른다. 문재인 정부는 정의의 복원을 추구하면서도, 첨예한 인권 의제를 논의의 장에 올리긴 싫어했다. 최근 소득주도성장이 표류하면서는 이런 모습이 국정 전반에서 엿보이는데, 최저임금과 자영업 등 여러 의제에 대해 청와대가 오히려 논의를 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정치인의 책임이다. 여론조사는 중요한 참고자료지만 피상적인 현상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때로 얄팍한 지식만으로 의제에 관여하기도 하며, 듣기 좋은 말에 본의와 상관없이 표를 던지기도 한다. 일부 과격한 목소리가 과하게 반영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동성애 반대 같은 구호 말이다. 결국 숙의가 열쇠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포퓰리즘적인 의제에 기울어질까 저어될 수도 있지만, 한 차례 이뤄졌던 숙의의 ‘실험’이 충분히 희망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피상적인 여론조사에 흔들리는 대신 숙의의 판을 조율해야 한다. 최저임금부터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대결과 충돌이 격화되고 있는 정국에, 소통이란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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