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작가 A 씨는 한 웹툰 에이전시와 구두로 하청계약을 체결했다. 작업이 끝나자 돌연 에이전시는 계약 때 약속한 금액보다 적은 금액을 지급하겠다고 말했다. 억울한 마음에 항의도 해보지만, 구두로 계약한 것이라 마땅한 증거도 없다. 에이전시는 5개월이 지나도록 그 돈 마저 주지 않았고, 현재 담당자는 연락이 두절됐다. 구두계약을 굳게 믿고 열심히 작업했건만 A 씨는 답답하다.

 

예술인들이 불공정한 계약, 임금 체불 등으로 고통 받고 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다

예술인들을 대상으로 한 불공정 행위가 늘고 있다. 불공정 행위는 창작자에게 불공정한 계약을 강요하거나, 임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는 행위 등을 가리킨다. 불공정 행위 신고건수는 지난 5년 간 크게 늘었다. 더불어민주당 김영주(서울 영등포구 갑) 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예술인 신문고에 접수된 불공정 계약 신고가 2014년 4건에 불과했던 반면 2017년 24건, 올해는 8월 기준으로 61건에 달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암암리에 있었던 불공정 문제가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관계자는 “과거 불공정 행위가 있었지만 예술인들이 이를 불공정한 행위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감내하는 경우가 많았다”라며 “예술인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문제가 드러난 것”이라고 전했다.

부당한 수입 분배구조로 계약을 맺는 예술인이 많다. 서울시 문화예술 불공정 피해 상담센터 관계자는 <YTN>과의 인터뷰에서 ‘계약 시 6대4, 7대3 정도로 창작자들이 수익을 더 적게 가져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또한 예술인들은 부당한 계약 조건을 강요받기도 한다. 서울특별시청이 발표한 <문화예술 불공정 실태조사>에서 만화·웹툰 작가 36.5%, 일러스트 작가 79%가 이를 겪었다고 밝혔다. 황승흠(국민대 법학) 교수는 “웹툰 작가의 원고가 늦을 때 물리는 벌금을 과도하게 매겨 원고료 자체를 주지 않는 계약을 맺는 경우도 있다”라고 전했다. 

‘매절계약’을 강요받아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침해받는 경우도 있다. 매절계약을 할 경우 2차 저작물 사용에 관해 창작자의 모든 권리를 계약자에게 넘기는 것을 말한다. 일례로 그림책 <구름빵>에 불공정 논란이 일기도 했다. 큰 인기를 얻으며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 2차 콘텐츠로 제작돼 수천억 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했지만 매절계약으로 원작자는 1,850만원밖에 지급받지 못했다. 약속된 수익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사례도 많았다. 지난 5년간 예술인 신문고에 접수된 임금체불액은 27억 원에 달하며, 불공정 신고 656건 중 517건이 임금체불 사건이었다. 서울특별시청 관계자는 “문화예술 불공정 상담 문의 중 계약서 검토를 제외하면 임금체불에 대한 질문이 가장 많다”라고 말했다. 이외에 구두·서면 계약을 체결하더라도 수익 배분 사항을 누락해 체불규모를 확정하지 못한 사건도 114건에 달했다.

인식에서 기인해

문화예술계 관계자들은 이러한 불공정 행위가 예술인의 창작행위를 노동으로 바라보지 않는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문화예술계는 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적다. 때문에 계약을 체결하려는 기관들은 창작물을 전시·표현하는 공간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예술인 활동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기관들이 창작물에 대한 적절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다. 한 산업디자인학 전문가는 “기관들이 예술인에게 예술활동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본다”라며 “이에 문화예술 창작물에 정당한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인식하지 않는 것”이라고 전했다.

서면 계약서가 의무화됐지만 여전히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문화예술계에는 친분관계에 의해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현저한 도제식 교육에 기인하며, 이후 계약과 관련된 분쟁을 해결을 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 명확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아 조정이 쉽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예술인 복지법> 개정으로 서면계약을 강제하고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문화예술계는 도제식 교육, 친분 관계가 중심이 돼 ‘우리끼리 무슨 계약서냐’라는 생각이 팽배하다”라며 “분쟁이 생기면 약자인 예술인 입장에서 불이익이 크기 때문에 계약금액, 기간 등이 명시되는 서면계약을 강제하도록 규제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서면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최근 5년간 발생한 임금체불 사건 중 구두계약을 체결하거나 수익배분 사항을 누락한 경우가 22%에 달했다. 각 예술분야의 특수성을 반영한 표준계약서 사용률도 저조하다. 최근 3년간 분야별 표준계약서 사용현황을 파악한 결과 대부분의 분야에서 실제 사용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문화예술 멍든다

불공정 행위는 예술인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문화예술 창작 생태계를 파괴한다. 창작물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아 예술인들은 생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예술활동의 지속 여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예술인소셜유니온 하장호 위원장은 “당장 생계가 위협받는 환경은 전반적인 문화예술을 쇠퇴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청년 예술인들은 불공정 행위에 취약하다. 기성 예술인보다 경험과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고, 약자인 상황에서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다. 경험을 쌓기 위해 불리한 조건에도 어쩔 수 없이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박인하(청강문화산업대 만화콘텐츠) 교수는 “기존 예술인보다 경험이 부족한 신진 예술가들은 예술 생태계에 진입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라고 밝혔다. 

불공정 바로 잡으려면

문화예술계 관계자들은 예술인에 대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술인들의 노력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장호 위원장은 “우리 사회에서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의미에 대한 합의점들이 필요하다”라며 “이런 것들이 정립되면 예술인들의 노동도 적절한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계약서를 쓰는 문화도 정착돼야 한다. 계약 기간, 비용 등이 정확히 명시되는 서면 계약을 체결하면 불공정 계약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이후 분쟁 발생 시에도 쉽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문체부는 서면 계약을 정착시키기 위해 서면계약 조사권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서면계약이 체결되지 않아 신고가 들어왔을 때 문체부가 이를 조사하는 제도에 관해 논의 중”이라며 “해당 제도가 도입되면 신고창구를 마련해 서면계약 미체결로 인한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공정 행위를 제재하는 법적제도 역시 강화돼야 한다. 현재 불공정 행위를 신고할 수 있는 예술인 신문고가 운영되고 있지만, 행정조치가 이뤄지기까지 관련 절차와 규정이 미비한 실정이다. 황승흠 교수는 “창작자들의 저작권을 강화하고 불공정 행위 제재 정도가 강해져야 한다”라며 “궁극적으로 소송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많아 관련 지원제도도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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