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1월 12일 일본 도쿄 외무성 별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외상이 마주 보고 앉아있다. ‘8,000만 달러가 최대한이오’ 3시간째 이어진 팽팽한 긴장감 속에 오히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에 김종필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무상 3억, 유상 2억, 민간 차관 1억, 총 6억 달러에 알파가 우리 정부의 요구요’ 단호한 그의 말에 오히라는 고민 끝에 이를 수용했고 합의 내용을 메모로 남겼다. 훗날 한일 협정의 실마리가 된 ‘김종필, 오히라 메모’가 작성된 날이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 때부터 장면 정권 당시까지도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 협상은 지속됐다. 하지만 협상은 영토, 배상 문제와 더불어 국내의 정치 문제까지 얽히면서 매번 난항을 겪었다. 5.16 군사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도 한일 협상에 나섰지만, 진척이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 개발 5주년 계획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을 통해 확보하고자 했다. 이철순(정치외교학) 교수는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 소득은 100달러대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였다”라며 “때문에 집권 세력은 경제 개발을 위해 일본 자본 도입을 추진하고자 했다”라고 전했다.

한일협상에서 일본의 자금 명목을 두고 우리나라와 일본의 입장 차이는 컸다. 우리나라는 청구권이라고 주장했지만 일본은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자금을 내려했다. 이에 당시 중앙정보부 김종필 부장은 일본 오히라 외상과의 단독회담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1961년 10월 21일 열린 첫 회담에서 오히라는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 원조 명목으로 3억 달러를 제시했고, 김종필은 6억 달러를 제시하면서 협상이 결렬됐다. 그리고 11월 12일 두 번째 회담이 열렸다. 약 4시간에 걸쳐 진행된 회담에서 무상 3억, 유상 2억, 민간 차관 1억, 총 6억 달러 지급으로 청구권 문제가 합의됐다. 두 사람은 해석의 차이를 방지하기 위해 메모로 회담 결과를 기록했다. 이후 해당 회담에서의 합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게 한일 협상이 타결됐다. 

하지만 김종필, 오히라 메모가 공개되자 많은 반발이 일어났다. 메모에는 금액과 방식만 기록돼 있었고 지급 명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해당 돈에 대한 성격을 두고 일본이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 겨둔 것이다. 이에 당시 굴욕 외교라는 비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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