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응천
문사철 대표

한국 현대사에 평행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대상 가운데 가장 소름 돋는 것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치이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으나 집권을 위해서는 친일파와 손을 잡는 것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추진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그렇게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행적은 실망 그 자체였다. 북진통일을 호언하던 태도와 달리 정작 6·25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나라를 지킬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서울 시민과 국회를 속이고 단신으로 피란을 떠나 버린 행위는 탄핵감이었다.
 
1952년, 전쟁의 와중에 제2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제헌헌법에서 대통령은 국회가 뽑도록 되어 있었다. 그대로 선거가 이루어지면 국회의 지지를 상실한 이승만은 가망이 없었다. 그걸 알고 있던 이승만은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도록 헌법을 고치려 했다. 그것은 오늘날의 대통령 직선제와 취지가 완전히 달랐다.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혼란을 두려워하는 국민은 현직 대통령을 뽑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개헌에 적극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용공 분자로 몰아 체포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개헌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손쉽게 재선된 것은 물론이다.
 
제헌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4년 연임으로 제한해 놓았는데, 개헌에도 불구하고 이는 유지되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집권 자유당에는 이승만을 대체할 유력 후보가 없었고 이승만은 권력을 내놓을 마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1954년 저 악명 높은 ‘사사오입 개헌 파동’이 일어난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을 없앤다는 기막힌 내용을 ‘사사오입(반올림)’이라는 기막힌 방법으로 통과시켜 버린 것이다. 당시 개헌 의결 정족수는 국회의원 재적 203명의 2/3인 136명이었는데, 표결 결과 135명이 찬성해 부결되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203명의 2/3는 산술적으로 135.33……이니까 이를 반올림하면 135명이 된다는 기상천외한 논리를 들고나왔고, 끝내 개헌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이처럼 무리한 방법으로 3선에 성공했다.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영구 집권을 꾀하다가 결국 4·19혁명을 만나 ‘삼진아웃’ 되고 만 것이다.
 
5. 16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이승만의 말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세운 제3공화국의 헌법은 대통령 4년 연임제를 다시 도입했다. 그 헌법에 따라 치러진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과 대결해 승리했다. 그런데 이승만이 심어 놓은 독재 바이러스는 집요했다. 권력에 취한 박정희는 3선 개헌을 밀어붙였다. 자신의 친위대인 민주공화당에서조차 반대자가 속출하는 상황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1971년 자신의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 나가 김대중에게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두었다. 김대중 후보는 유세 도중 박정희가 승리하면 히틀러 같은 총통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이 경고는 소름 끼칠 만큼 정확히 들어맞았다. 박정희는 이듬해 자신의 영구 집권을 보장하는 유신 헌법을 선포하고, 대한민국을 끔찍한 유신 독재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박정희가 이승만의 도플갱어처럼 3선 개헌에 이어 종신 집권까지 밀어붙인 결과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79년 열화와 같은 부마항쟁의 압박 속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안가의 술자리에서 박정희를 쏘아 죽였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평행이론은 그렇게 현실화되고 그렇게 끝이 났다. 많은 사람이 그것으로 독재 바이러스가 박멸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신군부라는 신형 바이러스가 ‘삼세번’을 외치기라도 하듯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독재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국민은 큰 희생을 치른 뒤에야 이 질긴 독재의 연쇄를 끊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끝이었을까? 6월 항쟁으로 태어난 87 체제에서조차 권력자의 일탈이 잇따르는 현상을 보면서 국민은 지금도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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