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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점에서 새로운 가치를 생각한다
  •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 교수
  • 승인 2018.11.04 04:50
  • 호수 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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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 교수 

한 시민단체에서 주최한 강연이 끝난 뒤에 가진 뒤풀이 자리였다. 강연은 아시아적 근대성에 대한 것이었고, 강연 중에 오갔던 주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러던 중에 어떤 남성이 “요즘 한국 여성들이 백인 남성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고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평소에 정치 관련 뉴스를 즐겨 찾아보고 SNS를 통해 이슈에 대한 정보를 다양하게 얻는다는 이른바 ‘깨어있는 시민’이었다. 즉각 반론들이 나왔다. 사랑에 국경이 없다는 말부터 그런 견해는 인종주의적일 수 있다는 지적까지 다양했다. 그러자 처음에 발언했던 그 남성은 “우리는 결코 백인이 될 수 없잖아요”라고 반문했다.   
 
어쩌면 이런 에피소드는 일상을 잠시 지나가는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그 남성의 생각은 순간적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남성의 말은 개인의 취향이나 성격을 드러내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왜 ‘깨어 있는’ 그 남성은 “우리는 결코 백인이 될 수 없다”고 발언했을까. 겉으로 보기에 이 말은 ‘백인’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의식의 차원에서 그 ‘백인’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는 증상이다. 물론 여기에서 동경이라는 것은 ‘백인이 될 수 없는 주체’인 자신을 거부하는 심리를 함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탈식민주의의 의제는 바로 이런 ‘주체’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란츠 파농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파농에게 ‘백인을 거부하자’는 발언은 사실 ‘백인에 대한 복수’를 의미한다. 파농의 논리에 따르면, ‘백인이 될 수 없는 주체’는 결코 ‘백인-됨’을 거부할 수 없다. “흑인의 영혼은 백인의 발명품”이라는 파농의 진술은 ‘백인이 될 수 없는 존재’의 무의식을 암시한다. 파농의 말을 해석하자면 아마도 흑인의 무의식은 백인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의미로 읽힐 것이다. 
 
파농은 “흑인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 답을 모색한다. 과연 흑인, 다시 말하자면, “백인이 될 수 없는 주체”는 무엇을 원하는가. 파농에 따르면, 이를 파악할 수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 번째 사실은 ‘백인은 자신들을 흑인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흑인은 자신들 또한 풍부하게 생각할 수 있고, 지력에서도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백인에게 증명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흑인에게 보편적인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개념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백인 노예가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흑인은 ‘백인’으로 거듭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후자는 불가능한 바람이다. 
 
파농의 입장에서 이렇게 백인이 되고 싶어 하는 흑인 못지않게 역겨운 존재는 백인에 대한 혐오를 유포하는 흑인이다. 파농에게 두 종류의 흑인은 사실상 하나의 판타지를 공유하고 있다. 마치 한국의 반미주의가 실제로 친미주의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것처럼, 백인에 대한 동경과 혐오는 동일한 판타지의 양면이다. 판타지라는 것은 무엇인가. ‘상실된 것을 언제든 복원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무엇인가 상실되었다는 근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든 복원할 수 있다고 믿는 ‘상실된 그것’이야말로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하자면, 상실되었다고 믿는 그것이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지금 한국 사회는 어떤 임계점에 와 있다는 생각이다. 그 임계점은 바로 미래에 대한 전망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남북관계의 개선이 가져올 새로운 국면은 분명 의미심장한 변화일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에 따르는 가치를 우리는 여전히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평화와 통일은 가치라기보다 조건이다. 이 조건 위에서 피어날 가치가 과거 국가건설의 과정에서 고착된 민족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한반도의 평화는 결과적으로 다른 긴장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족주의는 판타지라는 점에서 폐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재구성해야 하는 문제이다. 민족주의라는 판타지를 재구성하려면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 평화와 통일이 자본주의 경제의 영토 확장에 그친다면, 다가올 미래도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리라. “백인 될 수 없는 주체”가 아닌 이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의 도래를 고민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 교수  press@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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