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0월 어느 날,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만주일대에서 일본군이 한국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는 이를 알게 되자 곧장 취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일본에 의한 <동아일보> 정간과 취재 현장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비록 가서 학살되는 한이 있더라도 동포가 대량학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보도기관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그는 곧장 만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취재 현장에 도착한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는 곳곳을 둘러보며 참혹한 현실과 마주했다. 그는 본사에 전보를 통해 ‘빨간 핏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냐고 쫓아와 보니 우리가 상상했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며 ‘살풍경이 일어나 공포의 기운이 가득한 간도 일대에는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남녀노소가 살육의 난’이라 전했다. ‘훈춘사건’은 만주 훈춘지역에서 일본에 의해 약 5천 명의 한국인이 학살된 사건이다.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주지역 독립군 토벌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이 보복한 것이었다.

이후 장덕준은 취재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어느 날 밤 자신을 찾아온 일본군들을 따라 나간 뒤 종적을 감춘 것이다. 1921년 10월 28일 <독립신문>은 그가 취재 과정 중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본군의 반인륜적인 행위를 질책하자 일본군이 그를 암살한 것이라 보도했다. 

장덕준은 <동아일보> 창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중국에서 미국 의원단의 활동을 취재하면서 일본식민 지배를 받는 한국의 현실을 해외에 알리는 활동을 했다. 이에 1963년 3·1절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또한 그의 기자정신과 사명감을 기리기 위해 한국기자협회는 1971년 기자협회 기장 뒷면에 그의 얼굴을 새겨 넣기도 했다. 최상원(부경대 신문방송학) 박사는 <일제강점기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 3개국에 걸친 기자 장덕준의 언론활동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추송 장덕준은 △동아일보 창간 △한국 첫 해외특파원 △종군기자 △순직기자의 기록을 남기는 등 폭넓은 활동을 펼친 언론인’이라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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