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16일, 부산과 마산, 유신 독재, 민주화 운동. 나에게 ‘부마민주항쟁’은 저 단어들, 딱 그 정도였다. 특별한 감정이나 의미를 찾기엔 무리였다. 교과서에 놓인 사건의 ‘기록’이 나에겐 전부였으니. 그저 가을이 올 때마다 스치듯 들리는 역사적 사건일 뿐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부마민주항쟁이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매주 신문을 만드는 기자로서, 부마민주항쟁 39주년을 기념해 연극 <거룩한 양복>이 개최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기사로 쓸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여느 때와 같이 자료를 뒤져 사전조사를 하고, 취재계획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날 밤. 취재를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마주한 연극은 나를 너무나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극의 주인공 최정호는 값비싼 양복을 입고 등장했다. ‘잘 사는 사람들’만 양복을 입을 수 있었던 시대상을 비춰봤을 때 이상하게 느껴졌다. 허름한 옷을 걸쳐 입은 주변 인물과도 꽤 이질적이었다. 이런 최정호 주위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리의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최정호는 약속이라도 한 듯 시위대에 합류했다. 마치 시위대가 토해내는 울분에 공감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위가 사그라들 때쯤 최정호는 쓰러진 노동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대화 내내 최정호의 옷차림에 관심을 보이더니, 이내 그것을 빌려달라고 한다. 양복만을 고집했던 최정호와 이에 대한 간절함을 내비치던 노동자. 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이상하리만치 양복에 집착한 것일까? 어쩌면 이는 ‘잘 살고 싶다’는 그들의 소박한 소망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당대의 억압과 부당한 대우 속에 살아왔던 울분일지도 모르겠다. 최정호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런 양복을 태워버린다.

“내 양복 다 불태워 버려라. 빌려주는 게 아니라 마 통째로 줄라고” 이런 최정호의 대사는 그가 간직해왔던 울림이다. 그때의 일을 기억해왔다는 증거인 동시에 앞으로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다짐이다. 어쩌면 이들뿐만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부마민주항쟁은 ‘기억’이다. 반면 필자에게는 기록일 뿐이었다. 그 시절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그렇기에 일상적인 자유를 그저 누리고만 있는 필자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올해는 부마민주항쟁 39주년이다. 부산민주공원에서는 기념극을 비롯해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행사를 진행한다. 부마민주항쟁의 시발점이었던 우리 학교도 이를 기념하는 전시회와 영화제 등을 개최한다. 이러한 기념일에는 특별한 행사가 개최되곤 한다. 항상 반복되는 연례행사를 우리는 무감하게 넘기고 마는데, 이는 예의에 어긋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를 ‘기념’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들이 기억과 기록, 두 가지를 엮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협하고 싶지 않다. 고된 삶을 핑계로 이를 외면하지 않겠다. 다음 해의 필자는, 꼭 이를 기억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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