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10월 즈음. 서북지방 마을 곳곳이 어수선하다. 난데없이 일본 경찰들이 나타나 학생, 상인 등을 체포한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이들의 혐의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자그마치 600명이 넘는 사람들은 저지르지도 않은 일을 추궁당하며 수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우리나라의 국권은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국권침탈 후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 항일민족운동을 미리 뿌리 뽑고자 했다. 이러한 일제에 서북지방의 기독교계 반일세력과 신민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연이은 3건의 일본인 친일 세력 암살을 시도한 이가 모두 서북지방의 기독교인이었고, 신민회는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국내 최대 비밀결사 단체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날조해 항일운동 세력을 탄압고자 했다. 신민회의 지휘 아래 서북지방의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 계획이 진행됐다고 조작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민족 지도자를 포함해 학생, 상인 등 600여 명을 체포하여 6개월간 감금했다. 악랄한 고문으로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허위자백을 강요하기도 했다.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고 9개월 만인 1912년 6월, 사건에 대한 정식 재판이 열렸다. 600여 명 중 123명이 기소된 채,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절차가 이루어졌다. 이때 피의자들은 몸의 고문 흔적을 보이며 허위자백과 고문 사실을 폭로했으나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1심 판결에 불복한 이들은 상소했다. 52회의 공판 끝에 증거불충분으로 99명이 무죄선고를 받았다. 양기탁 등 나머지 6명은 1913년 최종심에서 무죄를 얻었지만 2년이 지나서야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105인 사건으로 인해, 회원 대다수가 연루됐던 신민회가 자연스레 해체수순을 밟는 등 국내 독립운동이 위축됐다. 그러나 연루자들이 해외로 망명해 국외에서 항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시준(단국대 사학) 교수는 “항일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들을 가둠으로써 일제의 저항세력을 소멸시키고자 한 것”이라며 “105인 사건으로 국내 독립운동이 축소됐지만, 이후 관련자들은 국외를 거점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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