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가 넘어서 초인종이 울렸다. 경호원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검은 그림자들이 문을 밀치고 쏟아져 들어왔다. (중략) 장교 두 명과 사병 대여섯 명이 내 가슴에 총을 겨누었다. 총구보다 칼이 더 섬뜩했다. 장교 하나가 사납게 말했다. ‘합수부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가셔야겠습니다.’ 내가 되물었다. ‘어디요?’ ‘계엄사란 말입니다.’ (중략) 내가 나오자 군인들이 양팔을 잡아끌었다. 잡힌 팔을 뿌리쳤다.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겨누며 따라왔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中 

1980년은 신군부의 권력 장악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망가지던 시기였다. ‘비상계엄을 해제하라!’ ‘유신잔당을 타도하라’ 등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가두시위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가두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김대중을 비롯한 26명을 시위 배후조종혐의로 긴급 체포했다. 계엄사령부는 김대중과 주변 인사들이 국민을 선동해 민중봉기와 정부전복을 계획했다는 내용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체포한 지 5일만 이었다. 그 후 김대중과 주변 인사들은 육군본부 검찰부에 송치돼 내란예비음모와 계엄법 위반 혐의 등으로 보통군법회의에 구속 기소됐다. 2개월이 지난 9월 17일 김대중은 △내란음모 △국가보안법위반 △반공법 △계엄법 △외국환관리법위반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사형을 중단하라는 세계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를 비롯한 세계 각국 인사들은 사형 중단 압력을 신군부에 가했다. 이로 인해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이후 2004년 법원은 <5.18특별법>에 따라 김대중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촉발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만열 역사학자는 <‘5.17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진실과 그 역사적 의의>에서 ‘광주 전남지역의 정치적 상징인 김대중의 구속은 지역민들을 자극하여 항쟁을 전면화 시키는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며 ‘앞으로 한국정치의 전개과정에서 군부의 정치개입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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