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남자에게 로또만큼이나 큰 행운이 있다. 바로 군 면제다. 친구 중에 행운아가 한 명 있다. 그놈은 축구를 하다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가끔 친구들끼리 축구를 하면 녀석을 만난다. 뛰어다니는 꼴을 볼 때마다 울컥하는 질투심에 깊은 태클을 넣고 싶어진다. 나에겐 그런 운이 없었다. 결국 21개월 동안 한적한 시골에서 까까머리로 지내야 했다. 휴가를 하루라도 더 받기 위해 생전 만져본 적도 없는 예초기를 돌리기도 했고 멈춘 것 같은 시간을 보내려 후임들에게 시답잖은 농담까지 했다. 그렇게 전역을 하고 보니 대학교 2학년 복학생. 행운아, 그놈은 대학원생이 됐고 나와는 ‘급’이 달랐다.

취재를 시작한 건 ‘저건 또 뭐야’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초등학생 때 뉴스에서 무심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본 적이 있다. 시간이 흘러 예비역 아저씨가 된 내게 그들은 질투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그들을 알아갈수록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 내가 만난 그들은 과거에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나라 팔아먹을 놈들’이 아니었다. 취재에 응해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한결같이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게 해 달라”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20여 년이 흘러서도 자신의 주장을 이어갔고 다른 이는 단호하게 ‘현역병과의 형평성’을 강조했다.

반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2년 동안 군대에 갇혀 있다가 사회로 나왔다. 그 상황에서 ‘내 신념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못 가겠다는 그들을 마주한다면, 더하면 더했지 차분히 앉아 대화해보자고는 못 하리라. 힘들게 2년을 보냈다고 하소연도 할 것이다. ‘땡볕에서 온종일 서 있었다’든가 ‘추운 겨울에 산속에서 못 돌아오는 줄 알았다’든가. 허나 과연 그들은 비난의 대상이기만 할까. 병역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파렴치한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오래도록 해온 주장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뒤집을 만큼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그들은 대체복무제도를 병역기피 수단으로 주장하는 게 아니다. 4주간의 군사훈련을 거부한 대가로 3년 이하의 수감 생활을 하는 게 아닌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역시도 기존 현역과 형평성을 맞춰 사회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와 평등을 고려해 모든 구성원이 제도의 도입을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군 복무를 이행한 사람들도 충분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는 병역을 다한 사람으로서 기존 현역복무를 잘 알고 있다. 때문에 형평성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쓸모 있는 집단이다. 우리가 참여해야만 대체복무제도가 사회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제도로 만들어질 수 있다. 

대체복무제도는 무심코 지나쳐온 주제의 ‘새로운 창구’가 될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이행해야 할 의무와 누려야 할 자유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의무를 부과하기 전에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든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토론이 가능하다. 선후관계가 얽혀 있어 매우 복잡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이 논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만이 아닌 우리나라의 청년들이 ‘국방의 의무’라는 이름으로 감수해야 했던 희생을 허심탄회하게 꺼내 보는 기회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