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기가 입술을 붙였다 떼며 ‘음마’하고 말했다. 초보부모는 제 아기가 ‘엄마’라고 말했다며 너무나 좋아한다. 다음날 아기는 조금 세게 두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 그러자 입술 사이로 ‘음빠’하는 소리가 나왔다. 초보부모는 아기가 ‘아빠’를 말했다며 아기를 얼싸안으며 좋아했다. 고작 입술을 붙였다가 떼는 단순한 행위의 반복으로도, 언어는 만들어지고, 언어의 기능을 알고 있는 이들은 거기서 의미를 찾아낸다.
아기가 자라면서 단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림책 속의 ‘초승달’을 가리켜 아기는 ‘바나나’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초승달이 바나나로 보이기 시작한다. 작고 동글동글한 것을 ‘콩’이라 말했더니, 동그랗게 생긴 ‘공’을 가리키며 아기는 무조건 ‘콩’이라 말한다. 아기의 행동을 보며 부모는 ‘콩’과 ‘공’의 간격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림책 속에서 ‘시계’를 배웠다. 이후 아기는 거실벽에 걸린 동그란 원목시계, 책상 위의 탁상시계, 음식점의 커다랗고 둥근 시계, 할머니집의 추가 길게 늘어진 벽걸이 시계를 가리키며, ‘시계’라고 말한다. 심지어 할아버지 손목에 있던 갈색 가죽줄의 손목시계도 ‘시계’라 언급한다. 이쯤 되니 아기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아기와 엄마는 하나의 시계를 보고, 시계라 말했는데, 아기는 그 후 모양과 크기가 다른 모든 시계를 저 혼자 구분해 내고 시계라 말하고 있다. 각 시계의 쓰임과 역할에 대해 말해주지 않아도 아기는 저 혼자 그것을 추론하고 이끌어내어 시계라 명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기는 이제 집 안 곳곳의 사물들을 가리키며, 사회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게 된다. 콩과 공을 구분하며, 시계와 둥근 시계를 분류하고, 밤하늘에 걸린 초승달과 접시 위의 바나나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는 아기가 말을 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이 아기의 작은 머릿속에서 얼마나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상상해 본다. 그것은 내 아기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인간이 거쳐 간 일이고, 지금도 통과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일이겠지만. 인간이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의 놀라움에 대해서, 그것을 습득하고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아기를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나뭇잎이 푸르고 있다. 짙푸르고 있다. 진푸르고도 있다. 간혹 연푸르고도 있는 나뭇잎이 올라가면서 더 푸르고 있다. 올라가면서 가늘고 있는 나뭇가지가 더 올라가면서 가늘고 있다. 여름 한창을 가늘고 있다. 여름이 가늘고 있다.(중략)”
그러다가 엄마는 문득, 김언 시인의 <있다>라는 시를 떠올린다. 아기와 엄마는 동화책을 읽으며 나뭇잎이 ‘푸르다’라고 말했다. 아기는 이제 나뭇잎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초록색’을 연상하게 된다. ‘초록나뭇잎’은 하나의 단어처럼 아기에게 사용된다. 하지만 김언 시인의 시처럼 나뭇잎은 ‘푸르다’라고만 말할 수 없다. 그것은 푸르고 있는 중이며, 어느 순간 짙푸르기도 하고, 진푸르기도 한다. 간혹 연푸른 나뭇잎의 모습을 띄기도 하고, 앞서 말한 모든 것이 다 합쳐진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는 그 모든 모습이 아니기도 한다. 그러니 나뭇잎을 ‘푸르다’라고 명명하며, ‘초록나뭇잎’이라 말하는 것은 나뭇잎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무지개 색깔이 일곱빛깔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색과 색의 경계에서, 색과 색이 나눠지고 합쳐지는 부분에서 무수히 많은 색들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빛들이 발현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엄마는 다시 고민에 빠진다. 아기가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엄마와 대화하는 날을 간절히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아기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을 분절하고 구획하며, 단순화시키게 되는 것은 아닌가, 라는 물음을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아기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보면서 던져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