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열망이 피어오르던 1980년 5월 15일. 점점 고조되던 가두시위가 절정을 이뤘다, 10만 명의 대학생들이 모여 ‘민주화’와 ‘계엄해제’를 외친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신군부의 전면 등장을 막기 위해 결국 서울역에서의 퇴각을 결정했다. 이를 ‘서울역 회군’이라 부른다.

10·26사태 이후 학원 자율화와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박정희의 사망으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면서 대학가에서는 학원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가 시작됐다. 이후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가 정권을 잡자 학생들은 계엄령 해제 등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며 더 크게 반발했다. 당시 서울 주요 대학은 신군부가 전면에 등장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교내 시위에 집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5월 13일 야간에 연세대 등이 교외 시위에 돌입했다. 점점 가두투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 흐름이 되자, 14일에는 대학 대부분이 시위에 나서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이튿날인 15일에 그 규모가 확대됐다.

시위가 절정에 달한 저녁 8시경 당시 신현확 국무총리가 ‘연말까지 개헌안 확정, 내년 상반기까지 양대 선거 실시’라는 민주화 일정을 발표하며 학생 시위대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이때 철야농성을 주장하는 측과 퇴각해 각 학교로 복귀하자는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심재철 회장 측의 주장이 부딪혔다. 당국이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보장하자, 심재철 회장의 의견에 따라 회군이 결정됐다. 16일 오후 3시 이화여대에서 전국총학생회장단회의를 열어 향후 대책을 논의하기로 한 것이다. 시민들의 호응이 부족한 상태에서 군이 투입될 경우 유혈진압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전국총학생회장단회의는 다음날까지 이어졌지만 6시에 찰기동대가 회의장을 급습해 학생회 간부들을 체포하면서, 사실상 상황이 종료되고 만다. 이후 전국으로 계엄령이 확대돼 ‘서울의 봄’이 막을 내린다.

서울역 회군을 두고 평가가 나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이종률 부장은 “신군부에 대항해 학생들이 선도투쟁을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면서도 “지도부가 우유부단해 학생들을 이끌 명확한 방침을 정하지 못했다는 점은 부정적”이라고 평가했다. 1980년 서울의 봄 주요 관련자를 취재한 바 있는 신동호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서울역 회군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것이 역사를 바꾸는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는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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