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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외면했던 그들의 절규] 눈물로 적어간 그들의 회고록을 펼치다김정미(철학 73), 노승일(정치외교학 73) 인터뷰
  • 백지호 기자
  • 승인 2018.05.13 06:38
  • 호수 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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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찍은 ‘낙인’을 지우기 얼마나 어려웠을까. 대학교 3학년 때 달린 꼬리표를 떼는데 41년의 세월이 걸렸다. 휴전 국가에서 그들은 ‘국가의 안보를 위협한 범죄자’였고, 그 죄목은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고된 시간을 견뎌낸 우리 학교의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전한다. 지난달 19일에 무죄가 확정된 김정미(철학 73) 씨와 노승일(정치외교학 73) 씨, 그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중앙정보부로 끌려가던 당시에 상황이 어떻게 전개됐나요?
김정미
: 1975년 10월 13일이었어요. 중간고사를 치려고 등교하던 중에 버스정류소에서 2명의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김오자를 알지, 김오자에 대해 물을게 있다’며 5분만 시간을 내달라고 했어요. 그들에 의해 끌려간 곳은 당시 대연동에 있던 중앙정보부 부산분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네 친구 김오자가 간첩’이라며 ‘김오자와 있었던 일을 모두 써라’고 했습니다. 5분이면 된다더니 지하 조사실에서 밤새도록 있었고 다음 날 오후에야 나올 수 있었어요. 당시 중앙정보부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발설하면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은 것과 알고 지내던 김오자 씨가 간첩이라는 사실에, 너무 무섭고 경황이 없었습니다. 외박을 했음에도 당시 가족들에게는 친구 집에서 자고 왔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죠.
그리고 17일에 학교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다시 부산분실로 저를 끌고 간 뒤, 김오자와 나눴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루를 지새우고, 그들은 저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쳐들어갔어요. 압수수색을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영장은 없었습니다. 결국 사색이 된 부모님을 뒤로하고 서울 남산에 위치한 중앙정보부로 가게 됐습니다.

△당시 불법구금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구금 당시 수사와 재판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김정미
: 어둡고 좁은 조사실에서 수사관들은 위압적인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고 하거나, ‘내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어라’는 말도 했습니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간첩이 됐다는 것에 어안이 벙벙하고 그들의 위협이 너무 두려워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저항할 의지마저도 없었죠. 며칠간 밤을 지새우며 그들의 입맛에 맞을 때까지 진술서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검사가 찾아왔습니다. 사법부의 검사라면 그래도 중앙정보부보다는 나을 거라 기대를 했죠. 하지만 그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검사는 오히려 ‘대통령 비판하면 간첩이라는 것은 국민학생도 아는데 대학생이 그것도 모르느냐’며 혼을 냈고, ‘너희 같은 애들은 극형을 내려야 한다’고 위협했습니다. 당시 검사의 조사라는 것도 중앙정보부가 짠 틀에 맞춰 답을 하는 작업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저는 수갑을 차고 재판장으로 가게 됐죠. 재판하러 가는 길, 멀리서 제 이름을 목 놓아 부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노승일: 일단 들어가면 옷을 다 벗깁니다. 구타하거나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다리 사이에 각목을 넣어 수사관이 올라가서 밟기도 했습니다. 한 수사관은 저에게 ‘너 같은 놈은 죽여버리고 자살로 처리하면 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맞다 보면 결국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진술서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도 그 취조실에서 당했던 구타가 꿈에 나타나곤 합니다.
재판장에도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와서 앉아 있었어요.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는 한 수사관이 찾아와 ‘부인하지 말고 다 시인하라’며 ‘그것만이 너가 살 수 있는 길’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검사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검사가 취조를 할 때 사실이 아닌 것에 부인하면 ‘너 다시 중앙정보부에서부터 시작해야겠구나’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징역을 선고받고, 이후의 삶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판결 이후의 삶을 듣고 싶습니다.
김정미
: 저는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전력이 있어 교사채용에 번번이 실패했어요. 전과가 적힌 서류를 제출하기 싫어, 제가 직접 과거에 겪었던 일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간첩 사건에 연루된 사람을 전염병 환자 보듯이 하던 때라 주변의 많은 사람이 떠나갔죠. 그때 받은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노승일: 아버지가 군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 저를 기르셨습니다. 무녀독남이기 때문에 가족이 제게 거는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징역을 선고받고 나서 마땅한 일자리를 얻기가 어려웠어요. 자연스럽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죠.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무죄를 입증하셨습니다. 현재 소감은 어떠신가요?
노승일
: 무죄를 받았지만 실감은 나지 않습니다. 기쁘기보다는, 그동안 잃어버린 세월이 너무나 길어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에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이제는 시효가 끝나서 당시 사건을 주도한 자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기억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오랜 시간 동안 재심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 사람들이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돼서는 안 되잖아요.

△고된 세월을 견뎌 내셨습니다. 우리 학교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신가요?
김정미
: 물론 내가 살아온 시대가 비극적이고 슬픈 시대였지만, 그런 세대가 끝이 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젊은 세대가 과거의 비극을 잊지 말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맞이할 미래를 통일의 시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념을 잣대로 사람의 인생이 판가름 나는 역사가 더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노승일: 당시 독재 권력이 자행한 일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아직도 그 피해자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로 혼자 아파하고 있어요. 젊은 세대가 그 사건을 기억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해줘야만 그 시대가 낳은 피해자들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독재정권의 만행이 후배들에게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백지호 기자  kkin4u0@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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