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시선 열린결말
우리는 말한다
  • 오선영 소설가
  • 승인 2018.05.06 07:28
  • 호수 1562
  • 댓글 0

오선영

소설가

지난해, 할리우드 유명 영화제작자의 성추문 사건 이후, 여배우들이 제가 겪은 성범죄를 공식석상에서 발언하였다. 한국에서는 한 여성검사가 <JTBC 뉴스룸>에 나와서 자신이 겪은 성추행을 폭로했다. 전직 법무부 간부에게 성추행과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는 글을 검찰 내부통신망에 올리고, 직접 방송에 출연해 제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인터넷상에서는 성범죄를 당한 여성들이 ‘#MeToo’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제가 겪은 끔찍한 일들을 말하고 있다. 학내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대자보들도 위와 같은 일들의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대자보와 기사들을 읽으면서 생각해본다. 이것이 과연, 해당 인물들에게만 일어난 일일까. 특정 개인에게 일어난 개별적이고, 사소한 일일까. 피해자의 △옷차림과 말투△성격 △손짓­·몸짓·걸음걸이 △웃음소리 △얼굴표정 때문에 일어난, 누군가의 말대로 피해자가 ‘적극적 거부’를 하지 않아서 생긴, ‘은근한 합의’로 인해 생긴 일인 것인가.

김혜나의 장편소설 <그랑주떼>는 여성이기 때문에 일상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크고 작은 성추행과 성폭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초등학생이 된 여주인공은 짝꿍인 남자아이 때문에 학교 가는 것이 싫었다. 그 애는 주인공의 원피스 자락을 들춰 팬티 색깔을 확인한 뒤, 다른 남자아이들에게 알려줬다. 학급의 남학생들은 ‘나’의 팬티색깔을 이야기하면서 ‘나’를 놀렸다. 부모님과 선생님께 짝꿍이 괴롭혀서 힘들다는 말을 하면, “그 애가 너를 좋아하나 보다”, “너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같은 말들이 돌아왔다. 하굣길, 길을 묻는 낯선 아저씨에게 수업시간에 배운 대로 친절하게 길을 안내했다. 아저씨는 나를 데리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서 성폭행을 했다. 그 남자는 내게 “착한 어린이지? 그렇지”라고 반복해서 되물었다. 믿었던 사촌오빠가 잠들어 있는 내 몸을 더듬었다. 아파트 옥상의 낯선 아저씨처럼 내 몸을 만지는 오빠의 모습에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촌오빠의 엄마인, 고모한테 이 일을 말하자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특히 네 엄마한테 절대로 말하지 마”라는 답이 왔다.

소설 속 ‘나’는 제가 겪은 성추행과 성폭력에 대해 주변사람들에게 말을 했다. 도움을 요청하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지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이라곤, “착한 아이니까 참아야 돼” 라는 말이었다. 그리곤 가족들이 소문을 피해 이사를 갔다.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에서 오카마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여성들은 언제든 자신을 표상해왔다. 주변화된 타자로 표상된다는 것은, 결코 여성 자신이 스스로를 표상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성은 늘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표상해왔다. 그러나 여성이 자기를 표출하는 ‘말’은 일방적으로 날조된 ‘보편적’인 말로 주변화 되고 은폐되어 왔다.”

그렇다. 신문기사와 대자보에 적혀 있는 일들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고질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위계와 권력, 폭력에 의한 성범죄에 대해서 말이다. 여성들은 이제껏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제 입장을 이야기하고 말을 했었다. 그것을 개별적이고 사소한 일로 치환하여 듣지 않으려 한 것은, 이 사회였다. 그리고 이제, 여성들은 다시 한 번 제 목소리의 주인공이 되려 한다. 그러니 우리는 들어야 한다. 피해 여성들이 제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무너진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더 이상 부정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다시 말을 해야 한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그랑주떼>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가서 제가 겪은 일들로부터 놓여날 수 있었다. 그때서야 “팔이 넓게 벌어지고, 멀리 나아가며 높게 날아”오르며 춤을 출 수 있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MeToo를, 대자보를 쓰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멀리, 높이, 길게 나는 ‘그랑주떼’를 출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해본다.

오선영 소설가  press@pusan.ac.kr

<저작권자 © 부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선영 소설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