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야, 패럴림픽 아이스하키 경기에 같이 가지 않을래?’ 이 제안이 나를 강릉행 버스를 타게 했다. 편도로 일곱 시간 걸리는 여정이었지만 그날만큼은 가는 길이 가깝게 느껴졌다. 내가 패럴림픽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교직 이수를 하면서 배운 특수교육학을 통해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패럴림픽 선수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싶었다. 환경 극복 의지 그리고 생생한 감동과 동기부여를 받고 싶었다.

처음에는 두 다리가 없는 선수, 한 다리만 있는 선수가 경기한다는 것에 놀랐지만, 경기가 진행되면서 처음만큼 놀랍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경기에 최선을 다했고 페널티를 받기도 했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후 가족, 친구들과 밝은 얼굴로 포옹을 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했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스스로 계속 질문했다. 왜 나는 패럴림픽 선수로부터 감동과 동기부여를 받고 싶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장애인은 장애를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역경 극복 의지를 보여줄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패럴림픽에 갔다고 하니까, 한 친구가‘그런 곳에 있는 자체로 영감을 얻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를 포함하여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장애인을 영감을 주는 대상으로 생각하는구나 싶었다. 우리가 아직 그들을 한 명의 온전한 인격체로 보기는 시간이 걸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애인은 감동을 주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고귀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일을 이룬 장애인에 대해서는 그들이 한 노력과 열정보다는 장애라는 한계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한계를 극복하면서 만들어지는 감동을 연출한다. 패럴림픽 선수도 올림픽 선수처럼 선수로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지만, 선수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장애를 가진 선수로 부각된다. 이 과정에서 장애는 극복해야 하는 것이 되고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굳어진다. 장애는‘키가 작다’처럼 하나의 부분이지만, 그 사람의 전부를 결정짓는 요소가 된다.

나는 호의적인 시선도 때로는 차별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의 안 좋은 점에 대해 미리 판단하는 부정적 편견도 나쁘지만 ‘긍정적 편견’ 또한 다른 이름의 차별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것뿐인데, 왜 일반인보다 더 특별한 시선을 보내고 감동을 기대하는 것일까? 자의적인 기준으로 아주 낮거나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그들을 특정한 기준에 맞추려고 했던 자신을 돌아보았다. 문제는 그들의 장애가 아니라, 장애인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었다.

『오만과 편견』에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라는 구절이 있다. 장애인을 향한 무의식적인 ‘긍정적 편견’ 또한 그들을 온전히 품지 못하게 만든다.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다. 특정 기념일은 지났지만, 장애와 비장애인의 진정한 통합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었으면 한다. 장애를 특별하게 보지 않고 장애인의 평범성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장애를 장애물로 간주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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