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민족말살통치로 우리 민족의 얼이 탄압받던 1934년 5월 7일, 우리나라에 순수학술연구단체 ‘진단학회’가 창립됐다. ‘한국은 물론 그 인근 지역의 문화에 대해서 관심의 영역에 두고 연구하는 것’이 그 취지였다. 즉, 우리 민족 스스로 독자적인 연구를 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진단학회는 활발한 학술 활동을 펼쳐나갔다. 진단학회가 설립된 해인 1934년 12월에 국한문으로 쓰인 정기 학술지 <진단학보>가 처음 발간됐다. 한 해에 총 4번 간행한다는 회칙을 정한 결과 <진단학보>는 1941년까지 14권에 이르렀다. 진단학회의 학자들은 우리나라 및 주변 나라의 문화를 포함해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다. 특히 역사학을 중점적으로 연구해 <진단학보> 1권부터 14권까지에서 역사학 논문은 82%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러한 <진단학보>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연구로 나온 결과물이었기에 당시 지식인은 물론 다양한 계층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1942년 민족의 주체적인 학술연구단체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차에 잠정 중단됐다. 일본에 의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주요 인사들이 체포됐기 때문이다. 광복을 맞은 1945년 8월 31일, 다시금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창립총회를 열었다. 조직체계를 재편성해 새 출발을 알렸음에도, 창립 당시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학회의 명칭과 설립 취지를 바꾸지는 않았다. 과거와 다름없이 진단학보를 발간하고, 강습회를 열어 국사 과목의 교사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중학생 국사교과서인 <국사교본>을 편찬하기도 했다. 이후의 간행된 국사교과서들은 <국사교본>의 형식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진단학회는 순수학술단체로서 역사적 한계가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적 위기 속에서 학문 연구만을 주력해 소극적으로 일본에 대응했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학을 발달시키고 학자들에게 자주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한영우 역사학자는 논문 <민족사학의 성립과 발전>에서 ‘역사학을 전문화시키고 세련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와의 대결의식이 약하고 더러는 일제와 협력하는 사례가 적지 않아서, 민족적 과제에 실천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큰 약점’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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