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암흑기라 불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 부산에서는 예술의 혼을 불태운 작가들이 있었다. 부산 미술은 이들의 활발한 창작 활동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지난 3월 16일부터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이를 재조명한 ‘모던과 혼성 1928-1938’과 ‘피란수도 부산: 절망 속에 핀 꽃’ 전시가 열렸다. 전시를 통해 당시 역사 속의 부산 화가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근대 서양화의 입구였던 부산

일제강점기, 개항을 통해 근대 문물이 유입되면서 부산 미술계에 서양화가 도입됐다. 개항 이전의 역사에서 부산 미술의 특징을 잡아내기는 쉽지 않다. 미술계 기반이 형성돼있지 않아 ‘부산’만의 뚜렷한 개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권침탈 이후 부산은 항구도시로서 일본인과 근대 문화 유입의 출입구 역할을 했다. 이는 미술사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세기 초부터 일본의 화가들이 양화, 일본화 화풍들을 전파했다. 부산의 근대미술은 이 시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했다.

부산을 거쳐 간 일본의 작가들은 화폭에 저마다의 특색으로 부산을 담았다. 그중에서도 안도 요시시게는 10여 년간 부산에 머무르며 부산 사람들의 소소한 생활상을 세심한 관찰과 표현을 통해 그려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엔 타자의 시선이 언뜻언뜻 드러난다. <시장풍경>은 우리나라의 시장을 타지인이 바라보는듯한, 이국적인 세계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부산의 서양화가들은 일본 유학을 가거나, 일본인 교사에게 미술을 배웠다. 부산 최초의 서양화가로는 임응구가 꼽히는데, 그는 부산에서 처음으로 서양화를 시작해 보급한 인물이다. 이어서 김종식과 우신출 등이 활발히 작품활동을 했다. 임응구는 우신출에게 유화를 지도하며, 견본을 삼을 그림으로 서양화의 한 장르인 정물화 <장미>를 선물하기도 했다. 한편 서양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향토성을 유지하고자 한 작가도 있다. 양달석은 민중의 삶을 소재로 선택하고 서양화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부산시립미술관 박진희 학예연구사는 “양달석의 작품 <나루터>는 캔버스, 유화 등 서양화 재료를 사용해 그린 서양화이다”라며 “그러나 향토적 소재와 구도가 마치 산수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라고 설명했다.

다양함이 피워낸 ‘부산’미술의 꽃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부산 미술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한다.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부산으로 피란을 오면서, 타 지역의 많은 미술 작가가 부산에 유입됐다. 임시수도였던 부산이 전쟁 중 미술 활동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당시 전쟁으로 부산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고, 피란 작가들은 그림 재료가 모자라 담뱃갑 속 은지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작가들은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였다. 예술 외에 참담한 심정을 표출할 배출구가 없어 더욱 예술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며 위로받고, 위기를 극복할 힘을 얻었다.

작가마다 전쟁 상황을 화폭에 담아내는 양상은 다양하다. 자신이 겪은 황폐한 삶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작가가 있다. 이중섭은 작품에서 자전적인 요소가 잘 드러나는 작가다. 전쟁, 생활고 등으로 가족과 이별한 이중섭은 늘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했고, 이는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그의 제목 미상 은지화를 보면 아이들의 손, 발이 묶여있는데, 가족과의 만남을 바라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 자신을 손발이 묶인 모습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피란 작가는 부산에서 머무는 동안 이곳에서의 삶을 그려내기도 했다. 장욱진은 <자갈치 시장>을 통해 단순한 형태로 활기찬 어촌 풍경을 그려냈다. 박진희 학예연구사는 “같은 상황에서도 예술가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달라 다양한 작품이 완성될 수 있었다”라며 “그러나 이들은 모두 피폐한 현실에서 작품활동에 더욱 매진하려 했다”라고 말했다.

같은 대상을 그린 작가들의 작품에서 각자의 개성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양달석의 <판자촌>과 김환기가 그린 <판잣집>은 같은 대상이라고 말하기 전까진 쉽사리 알아채기 힘들 정도다. 양달석은 다닥다닥 붙어 어수선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당시 판자촌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이에 반해 김환기는 판잣집을 단순한 형태와 노란색 등 밝은색으로 나타냈다. 이는 당시 전쟁에 대한 화가들의 각기 다른 태도가 미술작품에 나타난 것이다. 배진영(경성대 사학) 교수는 “양달석의 <판자촌>은 피해를 입은 피난민의 삶 등 당시 암울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라며 “김환기의 작품은 예술로서 전쟁을 회피하고자 한 것이 추상화 형태와 가깝게 나타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라고 전했다.

타지에서 온 작가들의 개성에 이질감을 느낀 부산의 작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향토성에 두고 이를 강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구체적인 예로 토벽동인 결성이 있는데, 이들은 향토적인 서정성과 리얼리즘을 추구했다. 부산을 소재로, 대부분 황토색을 사용해 작중에 향토적 요소를 드러냈다. 토벽동인의 대표 작가 김종식의 <부산항 여름>은 부산항을 소재로 해 향토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배진영 교수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가들이 부산에 모여들어, 부산 화가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했다”라며 “이러한 혼란의 시기를 통해 부산 작가들은 자의식을 확고히 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근대 부산 미술 “재조명 필요해”

암울하다고 여겨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기는 역설적으로 부산 미술이 찬란히 꽃 핀 시기이다. 한반도의 첫 관문이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일본의 서양화를 받아들인 일제강점기와, 임시적으로 중앙화단의 역할을 했던 피란기. 당시 부산의 독특한 환경은 화가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내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도록 했다. 이것이 곧 부산 미술의 큰 맥락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간 부산의 미술은 친일 요소 등에 의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고, 관련 자료도 많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목소리가 있다. 박진희 학예연구사는 “그간 부산의 지역성 등이 해당 시기의 미술을 설명할 때 고려되지 못했다”라며 “부산 미술이 훌륭하고 가치 있기 때문에 충분히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