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응천문사철 대표

한국사에서 평행이론의 적용 대상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것 가운데 1592년의 임진왜란과 1950년의 6.25전쟁만 한 것도 없다. 일단 둘 다 압록강 전선에서 중국의 개입을 초래했다. 임진왜란에서는 일본이 중국의 명나라를 정복하겠다고 공공연히 떠벌이며 국경을 위협했다.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6·25전쟁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국경을 위협했다. 중국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망설였지만 결국 북한에 지원군을 보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국경을 마주한 조선(북한)이 무너지면 중국도 위험해진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명나라는 조선의 군사작전권을 손에 넣었고 중국은 북한으로부터 군사작전권을 넘겨받아 전쟁을 지휘했다. 명나라 원군은 조선 땅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우고, 중국 인민지원군은 북한 땅에서 유엔군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두 전쟁이 모두 압록강까지 전선이 올라갔다가 중국의 개입으로 다시 내려갔다는 공통점만으로 평행이론을 논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다. 임진왜란에서 명나라가 도운 조선은 ‘우리나라’지만 6·25전쟁에서 중국이 도운 북한은 ‘우리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시점에서 보면 한번은 중국이 우리를 도우러 내려왔고 한번은 우리를 공격하러 내려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시점에서 임진왜란과 6·25전쟁의 평행이론을 거론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유명한 평행이론의 대상이 있다. 전쟁 당시 조선과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선조와 이승만이다. 굳이 구체적인 얘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두 사람의 평행이론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도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남긴 사례이니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북상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을 보내 충주에서 적을 격퇴하도록 했다. 그러나 신립의 군대는 탄금대 앞 결전에서 전멸하고 서울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선조는 한 나라의 주인인 자신이 일본군에게 잡히면 안 된다는 논리로 피란의 길에 올랐다. 임금에게 버림받은 서울의 백성들은 궁궐을 불태우고 조선 왕조를 저주했다. 선조는 압록강 변의 의주까지 도망간 것도 모자라 명나라로 망명할 생각까지 했다. 명나라가 이를 거부한 다음에야 그의 도피 행각은 끝이 났다.
6·25전쟁의 초기 상황은 임진왜란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38선 전역에서 남하하기 시작한 북한 인민군은 탱크를 앞세워 물밀 듯이 서울로 진격해 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북한의 포로가 되면 안 된다는 논리로 피란길에 올랐다. 전쟁이 일어난 지 이틀만인 6월 27일 새벽이었다. 선조는 얼마 안 되는 신하들과 궁인들의 시종을 받기라도 했지만, 이승만은 달랑 네 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야반도주를 했다. 일반 국민은 물론 내각과 국회에도 알리지 않았다.
어찌나 황급했던지 기차를 타고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대전으로 다시 올라가서 자신이 아직도 서울에 있는 것처럼 라디오 방송을 했다. 국군이 적의 침략을 잘 막고 있으니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라고 말이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쳐내려오자 이승만은 일본에 망명할 계획까지 세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자랑하고 다니던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선조는 왕 한 사람이 국가의 주권자이고 나머지 백성은 그의 노예라는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의 인물이다. 반면 이승만은 국민이 주권자이고 정치 지도자는 국민의 종이라는 시대에 속해 있다. 선조의 행위도 용납되기 힘든데 하물며 종이 주인을 버리고 도망간 짓에 해당하는 이승만의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선조와 이승만의 평행이론은 성립할 수 없는 지점에서 성립한 괴이한 평행이론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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