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몇 주만 보지 않으면 가요프로그램에 나오는 가수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아이돌’이 등장하고, 거리의 광고판에는 그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팬들의 ‘조공 광고’가 넘친다. 대학 도서관 열람실을 가면 이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공무원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아디다스 삼선 트레이닝 복을 입고 대학생활을 저당 잡힌 청년들이 곳곳에서 눈에 띤다. 몇 년 전, 수능이 끝나면 라디오에서는 대학 홍보 광고가 쏟아지던 시절이 있었다. ‘공무원 양성 사관학교’를 표방한 어느 대학의 광고는 지금 생각해도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다. 

지금 대한민국 청소년의 꿈은 아이돌과 공무원의 양극단을 달린다. 이 풍경 앞에서 대학은 어떤 비전을 청소년에게 줄 수 있을까? 매년 학부 졸업식에서 우리는 당신의 자녀들이 지닌 가능성을 믿고 기다려달라고 학부모들에게 부탁한다. 수요보다 공급이 넘치는 사회가 된 지금누구나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니 조바심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읍소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학하듯, 졸업생에게 당부한다. “여러분의 선생인 우리는 아직까지 진정으로 대학을 졸업 못하고 30년째 이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몇 년 만에 대학문을 나서는 여러분이 선생인 우리보다 훨씬 용기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물밀 듯 밀려오면 하릴없이 교정 이곳저곳을 거닌다. 때로는 대학이란 과연 어떤 곳인가를 생각하면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청년들의 고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반성한다. 대학이 꿈을 꾸는 곳이 아니라 현실을 깨닫는 곳으로 변해가고 학문의 전당이란 목적 대신 취업을 위해 거쳐 가야만 하는 통과의례의 장소로 전락한 지금, 어찌 보면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아직은 차가운 현실 인식이 결여되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공무원 양성 사관학교가 아니며, ‘이상’에 불과할지라도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변곡점을 지나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 이래로 계속 진보와는 거리가 먼 세계에 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영란법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었듯이 우리는 자율적인 도덕과 윤리 대신에 법과 규율로써 스스로를 옭아맸으며, 이념 대신에 실용을 택했다. 권력 관계는 더욱 조밀해지면서 ‘힘의 의지(will to power)’는 날로 커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다. 이런 혼란한 시기에 대학마저 제 역할을 못한다면 대학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대학이 ‘이념의 푯대 끝 깃발’의 역할을 자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은 단 한순간도 안정된 순간이 없다. 삶 자체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역동하는 청년의 에너지가 뻗어나갈 좌표를 제시하는 일, 그것이 바로 대학의 이념이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한 세기 전 시인 김억은 봄밤의 정취를 이렇게 표현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올 봄은 유난히 봄 같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캠퍼스의 봄’을 꿈꿔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대학이 이 사회에 존재하는 진정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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