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나는 자유주의자로 살았다. 리버럴. 발음에서부터 폼이 났기 때문이다. 때마침 마이클 샌델 열풍이 불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덩달아 그 분위기에 나도 달아올랐다. 자유주의의 결함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그에게 반했다. 그가 주장하는 공동체주의야말로 참된 시대정신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냅다 그 뒤로 숨었다. 그러다 어느 반골 청년처럼 마르크스에게 한방 세게 얻어맞고는 혁명에 관한 진지한 몽상에 잠겼다가, 이내 베른슈타인의 개량이라는 각성 음료를 한 움큼 들이마셔 꿈에서 깨어났다. 차례로 로크, 밀, 롤스, 하이에크, 아렌트, 그람시를 만났다. 학부 4년을 그렇게 보냈다.


읽으면 읽을수록 무언가 확고해지는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 반박을 해보고 옹호도 해보았지만, 결국 끝도 없이 내 정신은 유목민처럼 돌고 돌았다. 내 가치관을 어느 한 쪽으로 밀어 넣기엔 여러 거인의 철학은 드넓으면서도 빈틈없이 촘촘했다. 때로는 복잡하게 부정하고, 어쩔 땐 단순하게 설득당하는 인간의 변덕 탓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원래 사람이라는 존재가 어떤 매끈한 생각에 끼워 맞추기엔 태생적으로 울퉁불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세상에, 역사에 천재들이 너무 많은 것일 수도 있겠다. 나 같은 변방의 학생은 누구를 접하건 입 벌리고 감탄할 뿐 밖에. 타고난 반골인 줄 알았는데. 그냥 나, 천재에 맥없이 끌리고 잘 쓴 글을 좋아하는 거였구나.


또 다른 의구심도 있었다. 분명 이념은 세상을 설명하는 틀인데, 거꾸로 이 이데올로기라는 게 나를 자꾸만 외눈박이로 만드는 것 같다는 의심 말이다. 보조 바퀴를 다는 이유는 안정성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이념이라는 보조 바퀴만 달면 세상이 시끄럽고 더 큰 소란이 생긴다.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이념이 일으킨 문제가 해결한 문제보다 많다는 것을 자꾸 확인하게 되었다. 미디어의 토론을 보면, 서로의 편견만 늘어놓고 으르렁거리는 논객들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나는 보조 바퀴 없이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전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즘(-ism)이니, 니즘(-nism)이니 논할 만큼의 자기 철학을 갖추지도 못했고, 또 그럴 능력도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나는 대학 생활의 절반을 이념에 관한 책들을 읽어나가는 데 쏟아부었음에도, 나만의 철학을 발견하거나 완성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느 쪽인지를 정하는 것보다 항상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태도, 그 자체가 섹시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간단하다. 철학이 아니라, 배우는 자세를 고쳐먹자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건 간에, 스스로 무슨 주의자라 자칭하지 않기로 했다. 지레 단정 짓는 버릇부터 고치기로 했다. 몇몇 단서를 가지고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은 몇 가지 생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까다로운 존재니까. 사람을 대하는 것도, 지식을 대하는 것도, 사건을 다루는 것도 모두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어떤 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성실하게 정직한 사람이고 싶다. 천천히 두고 볼 줄 아는 여유 있는 마음,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것을 흔쾌히 인정할 줄 아는 두둑한 배포가 필요할 것이다. 나 잘 할 수 있을까?

나호선 (정치외교학 석사과정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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