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 때였던 1975년 4월 9일, 무고로 인해 이수병 외 7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는 대법원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은 지 18시간 만에 집행된 형이었다. 이 사건을 ‘제2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 사건’이라 부른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을 체결해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자금을 끌어오고자 했다.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은 대일 굴욕외교에 저항해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벌였다. 당시 정부는 시위를 억누르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다. 중앙정보부 김형욱 부장은 당시 혁신계 정치세력이라 불렸던 진보세력을 ‘인혁당’으로 엮어 모두 구속시켰다. 죄목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혁당을 조직하고, 학생들을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1차 인혁당 사건’이라 부른다. 당시 검찰 조사를 담당한 검사들이 ‘이 죄목은 증거불충분으로 그들을 구속할 수 없다’며 조사를 거부했지만, 박정희는 정권의 입맛에 맞는 검사를 투입해 불법으로 기소하고 재판을 진행하고 만다. 다행히 구속당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무죄로 풀려나고, 2명만 실형을 받으면서 끝이 난다. 

장기 집권에서 평생 집권으로 굳히려는 박정희 정권의 움직임에 국민들은 또 다시 반발했다. 1972년 유신헌법 공포 후 일시적으로 위축된 저항운동이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억누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삼선개헌 반대 운동 △민주화운동 △평화통일 운동을 지향하는 인물들을 대거 구속했다. 이들이 우리나라의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인혁당을 재건하려 한다고 조작했다. 이 일을 ‘2차 인혁당 사건’이라 한다. 결국 1975년 4월 8일 이수병을 포함한 8명이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들에게 재심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다음날 곧바로 사형이 집행됐다. 불과 선고된 지 18시간 만에. 국제사법자협회는 이를 ‘사법살인’이라 비난하며,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했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을 중앙정보부가 고문 등으로 조작한 사건이라고 규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유족들은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2007년 서울중앙지법은 ‘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 이수병 외 7명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이후 2011년 ‘1차 인혁당 사건’ 피고인과 유족들도 재심을 청구했고, 2015년 5월 도예종 씨 등 9명의 무죄가 입증됐다. 4.9통일평화재단 이창훈 사료실장은 “독재정권에 굴하지 않고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목숨 바쳤던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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