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어쩌면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였는지 모른다. 이를테면 아무 생각 없이 짐가방을 비서관에게 스윽 밀어준 정도, 어차피 가방엔 바퀴가 달려 있으니 무겁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는 비행기의 일등석을 탄 고객, 그것도 그 사람이 그 항공사의 오너라면, 땅콩 하나에도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가까이는 우리 대학 병원에서 있었던 일도 마찬가지이다. 전공의들은 원래 정강이 걷어차이면서 배워야 정신을 바짝 차리기 마련이고, 그것은 의사가 되는 과정의 일부라는 생각. 현직 교수들도 모두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 자리에 온 것이니 말이다. 또는, 적어도 군대는 특수한 곳이라 영이 서야 하고 군기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생각. 군에서 사단장쯤 되면 신적인 존재가 아닌가. 그 사단장 공관에서 이병, 일병에게 빨래 좀 시킨 것이 뭐 대수인가 하는 생각. 

그런데 의심의 여지조차 없던 그들의 상식이 어느 순간 ‘비양심’에 ‘갑질’로 둔갑하여 갖은 비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노룩패스라며 비아냥거리고, 땅콩회항에, 전공의 폭행, 군내 갑질에 학대라며 검찰 수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드디어 조직의 위계를 이용한 성폭력 사례들이 만천하에 공개되며 정점에 달하는 듯하다. 성이라는 지극히 원초적인 영역마저 갑질의 대상이 되고, 강압하고 착취하는 ‘문화’가 만연했던 것을 애써 모르는 척 하다 뒷덜미가 잡힌 꼴이다. 잘 차려진 음식과 멋진 옷, 그리고 고층 아파트에 가려져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던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야만성, 그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짧은 세월 압축 성장에 매진해 온 한국사회를 관통해 온 키워드는 단연 ‘경쟁’이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야 한다는 것은 한국인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부과된 업이었다. 성적이든, 주먹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남보다 많이 가져야 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못할 것이 없고, 그것을 이루는 순간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에게 욕을 퍼붓고, 무릎 꿇리고, 심지어 성을 착취할 수도 있는 특권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해 왔다. 연민과 공감은 없고 그저 갑과 을, 강자와 약자, 승자와 패자만이 존재하는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세상은 정글이라고 말해 왔다. 그리고 정글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우리는 약육강식만이 유일한 원리인 야만의 삶 속에서 점점 괴물이 되어갔다.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에서부터 조금이라도 힘없고 어려운 아이들은 집단으로 따돌림을 당한다. 동네에서도, 일터에서도, 정치판에서도, 손톱만한 권력이 곧 완장이 된다. 돈이 좀 더 있거나 나이가 좀 많다는 이유로, 정규직이라는 구실로, 그리고 하다못해 우연히 얻어걸린 남자라는, 정말 이유 같지 않은 이유들로 빚어지는 갑질들은 일상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저 입장만 바꿔놓고 생각하라는 동서고금의 진리는 내팽개쳐진지 오래다. 

최근의 사건들을 계기로 차별과 갑질로 점철되었던 야만의 일상은 사라지기를 바란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우리는 그렇게 자라왔다. 그러나 더 이상 이렇게 살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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