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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문, 그 첫걸음을 내딛다
  • 곽령은 기자
  • 승인 2018.04.01 07:00
  • 호수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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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4월 7일, 정동의 한 신문사 안. 인쇄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인쇄기에서는 한글이 빼곡히 적힌 신문이 나오고 있다. 이 신문의 1면을 장식한 창간사에는 ‘정부가 하는 일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게 알리며, 부정부패한 탐관오리를 고발하겠다’고 기록돼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한성주보>의 폐간 이후 우리나라 사람이 발행한 신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유일한 신문이었던 일본 외무성의 기관지 <한성신보>는 일본의 주장과 이익을 대변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등에서 왜곡 보도의 작태를 보일 정도로. 유길준 내부대신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창간을 준비하고, 서양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우리’ 신문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때문에 유길준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고자 했다. 이는 1895년 말 서재필이 귀국하면서 구체화됐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 역시 신문의 필요성에 공감했고, 1896년 1월 두 사람은 새로운 신문사의 설립과 국문판 및 영문판을 동시에 창간하기로 합의한다. 이들이 순 한글 신문을 만들고자 한 것은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허나 일본은 <독립신문> 창간 준비를 방해하기 시작한다. 이 방해는 유길준과 서재필에게 집중됐다. <윤치호일기>에 따르면 일본은 서재필에게 ‘<한성신보>는 계속 간행돼야 하므로 경쟁지를 만들려는 어떠한 시도도 분쇄하겠다’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신문 창간은 <한성신보>의 조선 언로 독점을 위협하는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896년 2월 11일 갑작스럽게 아관파천이 일어나 조선에서 일본의 세력이 약화됐다. 일본의 방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새롭게 구성된 친러파 내각이 신문 창간 계획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물질적인 지원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결국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우리의’ 신문을 위한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독립신문은 조선 사회 전반에 신문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독립신문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면서 연이어 △<매일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이 창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채백(신문방송학) 교수는 “1898년 창간된 <매일신문>은 논설에서 <독립신문>을 ‘선생 신문’, 본인을 ‘제자 신문’이라고 칭했다”라며 “독립신문은 신문 매체의 중요성을 인식시켰고 이후 여러 신문이 창간되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라고 설명했다.

곽령은 기자  emily3812@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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