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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라진 삶과 계속되는 기억] '죽음'이 '비극'으로 남아선 안된다
  • 백지호 기자
  • 승인 2018.04.01 05:57
  • 호수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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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옴팡밭에 붙박인 인고의 삼십 년, 삼십 년이라면 그럭저럭 잊고 지낸 만 한세월이 건만 순이 삼촌은 그렇지를 못했다. 흰 뼈와 총알이 출토되는 그옴 팡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딸네 모르게 서울 우리집에 올라온 것도 당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그 옴팡밭을 내팽개쳐보려는 마지막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 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 었다.당신은 이미 그때 죽은 사람이었다.”

소설 <순이 삼촌> 中에서

제주4·3이 발생한 지 올해로 70년이다. 침묵했던 시간을 지나 그 진실을 드러내려 했지만, 앞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제주4·3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본다.

아직도갈길이멀다

지난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이 제정됐지만, 피해자들의 상처가 아물기 위해선 노력이 더 필요했다. 4·3특별법에는 희생자 및 유족의 배·보상에 관한 내용이 빠져있다. 법률의 초안을 만들던 당시에는 피해배상에 관한 조항이 존재했지만, 진상조사를 하고 나서 배상을 말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최종 법안에서는 사라진 것이다. 2003년 배경과 일부 피해사례를 담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발표된 후, 15년 동안 피해자들의 배상문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제주4·3 희생자 유족회 양윤경 회장은 “희생자와 유족들에게는 시간이 없다”라며 “돌아가 시기 전에 한 분이라도 배·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라고 전했다.

기존의 진상보고서가 미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2003년 발표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개괄적인 내용이라, 앞으로 보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을이 화재로 소실돼버린 경우 소각명령 을 내린 책임자가 누구인지 명시되지 않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북촌리 학살 사건에 대해서도 가담했던 부대만 적시돼 있을 뿐 부대의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때문에 추가로 밝혀야 할 내용이 존재한다. 양정심(대진대 인문학 연구소) 교수는 “개별적인 사례가 더 파 악돼야 한다”라며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진상조사위원회의 회의가 개최되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법적근거 없이 이뤄진 군사재판 피해자들의 명예회복도 필요하다. 민간인을 대상으로한 군사재판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에 열렸다. 이는 법률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재판이었다. 2,530명이 해당 재판을 받았고, 대부분은 내란죄와 간첩죄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현재 군사 재판의 생존자들이 재심을 청구하고 있지만, 판결문 등 근거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박찬식 운영위원장은 “판결문이 없어 재심청구가 어렵다”라며 “당시 재판을 무효로 규정하는 법안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화해와 치유 가능할까

이제는 제주4·3사건 피해자의 상처를 회 복하고, 화해의 시대로 가려는 움직임이 있다. 유족들의 심리적 고통을 치유하고 관리 할 수 있게 제주4·3트라우마센터를 설치 하는 내용이 4·3특별법 전부 개정안에 포함됐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과 자녀들의 정신적 아픔을 치료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나이를 고려해 전문요양병원이 만들어져야 한다. 양윤경 회장은 “트라우마 치유센터와 더불어 연로한 희생자와 유족을 위해 전문 요양병원도 필요하다”라고 전했다.

또한 미군정이 제주4·3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학살의 전면에 나선 것은 우리나라 경찰과 군인 이지만 실제 작전을 지휘한 것은 미군의 고문단이기 때문이다. 박찬식 운영위원장 은 “미군의 강경작전은 4·3사건의 희생자 가 늘어난 큰 원인”이라며 “미국 정부에 사과를 요청하기 위해 10만 서명운동을 진행 중이다”라고 밝혔다.

미래는 4·3을 어떻게 떠올려야 하나

이제는 제주4·3사건을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현재 제주4·3의 역사적 의미는 주민들의 학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4·3특별법에 따르면 제주4·3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는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이 빠져있다. 양정심 교수는 “희생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제주4·3사건을 반쪽만 기억하는 것” 이라며 “미래세대에게 4·3사건이 발생한 배경을 알려주고, 당시 제주도민들이 가진 자주적 의식과 함께 기억할 수 있 게 해야 한다”라고 전했다.

발생원인을 정확히 명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제주4·3사건을 항쟁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5·10 선거를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요구했다. 그러다 경찰의 탄압을 받게 됐다. 때문에 제주4·3 사건을 부당한 공권력에 대항해 자신들의 의지를 표출한 항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4·3연구소 김은희 연구실장은 “4·3 의 정신은 냉전의 시작에 저항한 제주도민 의 항쟁”이라며 “제대로 된 명칭으로 제주4·3을 후세에 알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백지호 기자  kkin4u0@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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