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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라진 삶과 계속되는 기억] 그해 봄에 핀 유채꽃은 핏빛이었다
  • 백지호 기자
  • 승인 2018.04.01 05:53
  • 호수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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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제주도는 해방 직후 다른국면을 맞는다. 해외에 있던 사람들은 광복이 됐다는 소식에 섬으로 돌아 온다. 하지만 당시 제주도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전국적인 흉년에 식량이 부족했고, 급격히 많아진 인구로 섬에는 실업자가 늘어났다. 도민들의 삶이 열악함에도, 미군정이 기용한 친일경찰들은 부패와 비리를 일삼기도 했다. 이로 인해 미군정과 친일 경찰 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불신은 깊어갔다.

3·1절 기념집회에서 총성이 울리다

광복을 기념하는 집회는 총알이 빗발치는 아비규환이 된다.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28주년의 3·1절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이 집회에는 2만5천명에서 3만 명의 도민이 참가했고, 이들은 ‘친일파를 처단하자’,‘자주적인 통일조국 쟁취하자’등의 구호를 외치며 관덕정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을 막기 위해 미군정은 경찰 400여 명을 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중 집회에 참여한 6세 어린이가 경관이탄 말에 치인다. 군중들은 야유하며 경관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를 쫓아 경찰서 방향으로 향했다. 경찰은 몰려오는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판단해, 이들에게 총을 발 포한다. 총탄에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 을 입었다. 경찰은 당일 초저녁부터 제주도에 통행금지령을 내렸고, 발포의 정당성 강조에 주력했다. 경찰은 3·1절 기념집회를 준비한 남조선노동당을 선동자로 지목하고, 3·1절 기념행사준비위원회 간부와 가담한 학생들을 수감했다.

제주도민들은 경찰의 행동에 불만을 표출 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3·1사건’으로부터 9일뒤, 도민들은경찰의 민중을 향한 발포에 항의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여기에는 민간 기업은 물론 제주도청과 학교같은 공공기관 종사자도 포함돼 당시 25만 명이었던 도민 중 4만 여명이 참여했다.이에 경찰 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해 400여 명의 경찰을 파견했고, 이틀 만에 파업에 관련된 200여 명을 잡아갔다. 또한 민간 반공 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도 대거 제주로 내려와, 도민들을 학대한다. 4·3범국민위원회 박찬식 운영위원장은 “서북청년회는 제주도민들에게 태극기나 이승만 초상화를 강매해, 운영자금을 마련했다”라며 “그들에게 협조 하지않는 도민은 좌파로 간주해 가차 없는 폭력이 가해졌다”라고 전했다.

“탄압이면 항쟁이다”

무고한 시민을 종북세력으로 몰아가는 검거가 계속됐고, 잡히면 극심한 고문을 받게 된다는 소문이 제주도민들 사이에 퍼졌다. 이 와중에 조천 중학원생이던 김용철이 고문치사된다. 또한 모슬포지서에 서 청년 양은하 씨까지 고문으로 사망하며 도민들은 분노했다.

공권력의 극심한 짓누름에 제주도민들은 들고 일어났다. 남조선노동당 제주도위원회는 1948년 4월 3일에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350여 명으로 구성된 무장대는 도내 12개 경찰 지서와 우익단체 사무실 등을 공격했다. 이들은 △경찰과 우익단 체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독선거 반대 △조국의 통일 등을 주장했다. 무장대는 남한 단독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투표소를 습격하는 등 총력을 기했다. 결국 전국200개선거구 가운데 제주도의 2개선거구가 과반수 미달로 무산됐다. 제주4·3 연구소 김은희 연구실장은 “5.10선거 무산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반대에 중점을 두면 안된다”라며 “이는 분단을 거부하는 제주도민들의 투쟁”이라고 말했다.

국가가 앞장서 진행한 학살

미군정은 무장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 이후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군 병력을 집중한다.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에서 5km 이상의 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 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자 경찰과 군인 및 서북청년회 단원은 주민탄압에 박차를 가한다. 이들은 중산간 마을 주민 들을 집단으로 학살했고, 해안마을 주민들도 가족 중 일부가 좌익세력이라면 살해했다. 결국 제주도중 산간 마을의95%가 방화됐고, 마을 전체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많은 주민이 토벌대를 피해산간으로 도망쳤고, 1949년 3월에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정책이 있고나서야 주민들은 하산할 수 있었다. 1954년 9월 21일에 한라산의 출입 통제구역이 개방되면서 사건이 일단락됐다.

제주4·3사건의 결과는 참혹했다. 2003년<제주 4·3사건 진상 보고서>에 따르면 14,028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그 수는 더욱 늘어나 현재 2만 5,000명이 넘게 파악되고 있다. 당시 제주도민이 25만 명이었던 도민의 십분의일이 사망한 것이다. 이는 전국단위로는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고, 지역단위로는 가장 많은 사상자 수치다. 

백지호 기자  kkin4u0@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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